[세상읽기] 우리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도시의 풍경을 바꾸는 높은 건물,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 공중을 달리는 다리. ‘건설’ 하면 떠오르는 웅장하고 진취적인 이미지다. 그러나 건설하는 일에 대한 이미지는 전혀 다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하는 일. 삶의 자리를 짓는 일은 일의 세계에 자리를 얻지 못하고, 아직 일의 자리에 닿지 못한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노가다’가 된다. 건설 현장은 법질서로 조직된 현대사회를 아직 따라오지 못하는 곳으로 연상되고, 누군가 ‘건폭’이라는 말을 던지면 그럴 법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건설현장에 법보다 폭력이 앞선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흔히 떠올리는 육체의 폭력이 아니라 자본의 폭력이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널리 이름이 알려진 건설사가 권력의 정점에 있다. 그들은 공사를 따내고 광고를 하는 일로 이윤을 올리고, 건물 짓는 일은 책임과 함께 하청업체로 떠넘긴다. 2022년 등록 건설업체 수는 9만4567개. 한국에 그렇게 많다는 치킨집이나 편의점보다 많다. 이들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식은 건설노동자의 임금을 떼어먹거나 공사기간을 맞추려고 안전조치를 무시하는 것 등이다. 법은 다단계 하도급을 금지하지만 자본은 건설현장에 법을 금지한다.
사회가 유지되는 원리를 정하는 것이 법이라면 건설현장에 법을 세워온 것은 건설노조다. 사람이 살아야 건물도 지어질 테니 안전화와 안전모를 지급하라는 요구부터 원청업체에 안전보건 책임을 묻는 입법 활동을 이어왔다. 사람은 비 오면 창고에 넣었다 아무 때나 꺼내 쓰는 기계가 아니니 노동시간과 휴식에 관한 기준을 정해야 했다. 공사를 마쳐야 돈을 줄 수 있다며 일부터 시키려고 할 때 정해진 기한 내 정해진 임금을 지급하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부실시공을 낳는 다단계 하도급을 정부가 방치할 때 건설노조는 재하도급의 동기를 차단해왔다. 더디게나마 건설산업 구조는 이윤보다 모두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순위에 놓도록 변화하고 있다. 세상을 건설하려니 새 세상까지 건설해야 했던, 건설노조의 역사다.
설계도가 있으면 편하련만 마땅치 않았다.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의 조항들은 건설산업의 특성에 딱 들어맞지 않아 건설노조는 스스로 길을 내야 했다. 무슨 일을 하든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감각에 기댈 뿐이었다. 정치인들이 구호로만 말하는 ‘저녁이 있는 삶’ 같은 것들. 민주노총 건설노조 조합원의 평균 퇴근 시간은 다른 건설노동자보다 10분 이르다(2022년 건설근로자 종합생활실태조사). 수만명의 조합원이 수천일의 시간을 쌓아 만든 변화가 고작 10분이다. 하지만 저녁에는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내일을 위해 쉴 수도 있다는 걸 알아버린 사람들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그 10분은 모든 건설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단축할 강력한 힘이 된다. 세상을 건설하는 일이 그렇듯 새 세상을 건설하는 일도 작은 몸짓이 차곡차곡 쌓여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만드는 일이다.
“제 자존심이 허락되지가 않네요.” 건설노동자 양회동이 제 몸에 불을 붙이며 남긴 말이 그의 것일 수만은 없다. 사람의 존엄과 권리를 지키고 키우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고 법의 기능이라고 믿는다면, 온갖 국가기관을 동원해 새 세상을 무너뜨리려는 윤석열 정부는, 우리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쩌면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말하는 자긍심은 존엄을 이루는 방법에 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혼자 건물을 지어올릴 수 없다는 걸 아는, 서로 다른 수많은 노동들이 기어이 만나고 엮이며 무언가 이뤄내는 시간에 대한 감각. 존엄은 다 지어진 건물처럼 어느날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쌓아올리고 비뚤어진 곳을 바로잡고 때로는 부숴 다시 만들기도 하는, 촘촘하게 현재를 잇는 수고로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걸 기억해야겠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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