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세계 최고였던 조선의 은 제련술, 日을 부강하게 만들다
유대인이 주도해 만든 동인도회사와 일본
유대 무역상들이 주도해 만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국과 일본에서 기독교 선교 문제로 쫓겨난 서구 열강들의 빈자리를 차지해 독점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이 믿는 유대교는 다른 민족에게 전도하는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도네시아에서 향신료를, 일본과 중국에서 도자기, 비단, 중국차 등을 수입해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큰돈을 번 것은 이러한 상품 수입이 아니라 환차익 거래였다. 서양과 중국의 금과 은의 상이한 교환 비율을 이용한 차익 거래(Arbitrage)로 큰 수익을 올린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상품으로 벌어들인 돈은 전체 수익의 22%인 데 반해 환차익 거래로 벌어들인 돈이 78%였다고 한다. 당시 중국은 1581년 이래 시행해온 일조편법으로 은이 조세의 기본이었다. 따라서 은 수요가 많아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1대6인 반면 서양의 금은 교환 비율은 1대12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서양의 은을 갖고 와서 중국의 금과 교환할 때마다 100% 수익을 올렸다.
근대 일본의 주요 수출품은 은과 도자기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일본에서 주로 수입한 것이 은과 도자기였다. 처음에는 은을 네덜란드에서 갖고 왔으나 나중에는 일본에서 은을 싼값에 조달해 이를 중국의 금과 교환해 큰 수익을 올렸다. 일본에선 16세기 중반부터 막부들이 전쟁 자금 준비를 위해 은광과 금광을 많이 개발했다. 1526년 시마네현에서 대규모 이와미 은광이 발견되어 일본이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은을 캐내어 수출했다. 일본이 이렇게 많은 은을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은 제련 기술 덕분이었다. 16세기 이전에는 일본에 은 제련 기술이 없어, 일본 역사서에는 은광석 덩어리를 배에 싣고 조선으로 건너가 제련해서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다 1533년에 조선의 ‘연은 분리법’이라고 하는 은 제련술이 일본에 전해졌다. 이를 회취법(灰吹法)이라고도 불렀다. 이로써 일본은 비로소 은을 제련하는 국가로 변신한다.
은은 의외로 제련이 까다로운 금속이다. 16세기 이전의 채은법은 금을 분리할 때 부산물처럼 얻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상당히 수율이 떨어지는 방식이었다. 당시 은이 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평가된 것도 이러한 제련의 어려움에도 기인했다. 대개 은 광석에는 납이 많이 들어 있어 은과 납을 분리하는 제련 기술 없이는 은 생산이 크게 늘어날 수 없었다.
그 무렵 중남미에서 쓰인 ‘수은 아말감법’은 은 광석을 잘게 부수어 수은과 섞어 아말감으로 만든 다음 광석의 잔재를 거른 뒤 가열해서 수은을 날려버리고 은만 추출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기술은 큰 문제를 갖고 있었다.
1550년 쯤 세계 최대의 은 광산이 당시 볼리비아 포토시(Potosi)에서 발견되었다. 문제는 수은 아말감 공법으로 인해 공기 중에 방출된 수은 중독으로 많은 인디오가 희생되었다.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1550~1800년에 인디언 8백만명이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대안으로 개발된 것이 파티오(patio·마당) 공정이다. 이는 은 광석을 곱게 갈아 마당에 펼쳐 놓고, 수은·소금·황산구리를 뿌린 후 노새로 하여금 그 위를 달리게 해 섞는다. 그러면 화학반응이 일어나 은이 수은에 녹아 나온다.
조선, ‘연은 분리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다
일본에서 질 좋은 은을 대량으로 생산해 낸 제련술은 이와 달리 먼저 은 광석을 납과 함께 녹인 다음 떠오르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나서 재를 이용해 은을 납에서 분리하는 ‘연은 분리법’이었다. 이 제련술은 원래 조선에서 16세기 초에 개발한 것으로 당시 유럽의 은 제련술보다 월등히 앞선 획기적 기술이었다. 당시 중국은 조선이 수입하는 비단 등의 대금 결제를 은으로 요구해 부진하던 조선의 은 광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증가하는 은 수요로 개인에게도 은광 개발이 허락되면서 은 제련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1503년 궁중의 금은 세공에 동원된 기술자들이 새로운 제련법을 개발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1503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양인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 노비 김검동(金儉同)이 납으로 은을 불려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제련은 무쇠 화로나 용기 안에 뜨거운 숯을 조각조각 넣어서 채운 다음 깨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라고 아뢰니, ‘시험해 보라’고 했다.”(연산 9년 5월 18일)
이 획기적 기술을 19세기 후반 실학자 이규경은 저서 ‘오주서종(五洲書種)’에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먼저 은이 포함된 광석을 채취한 후, 노(爐) 밑에 조그마한 구덩이를 파고 뜨거운 불을 깔아 둔다. 그 위에다 아연 조각들을 깔고 은광석을 펼쳐 둔다. 사방에 불티가 남아있는 재를 덮고 소나무로 덮는다. 부채를 가지고 불을 지피면 불길이 일어나는데 아연이 먼저 녹아내리고 은광석은 천천히 녹는다. 그러다 아연 녹은 물이 끓어오르면서 갑자기 은광석이 갈라지고 그 위로 아연이 흘러나온다. 이때 물을 뿌리면 은이 응고하면서 아연과 분리된다.”
이렇게 조선은 은을 포함하고 있는 아연 광석에서 재를 이용해 순도 높은 은을 분리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당시 유럽의 은 제련술은 은광석을 녹여 노 밑으로 흘러나오는 용융액을 받는 방식이었다. 은과 아연은 녹는점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 방법은 은과 아연을 분리할 수는 있었지만 순도가 보장되지 않았다. 김감불과 김검동의 연은 분리법은 순도가 높아 당시 세계 최고의 제련술이었다.
일본, 조선의 은 제련술로 부흥하다
하지만 조선이 개발한 연은 분리법은 조선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일본에서 꽃을 피웠다. 1516년 중종은 연산군 때의 사치 풍조 척결을 내세워 은광 채굴을 금지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1539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전주 판관) 유서종이 왜놈과 사사로이 통해서 연철을 많이 사다가 자기 집에서 불려 은으로 만드는가 하면, 왜놈에게 그 방법을 전습했으니 그 죄가 막중합니다. 철저히 조사하여 법대로 죄를 정하소서.” (중종 34년 8월 10일)
또 일본 이와미 은광 홍보 자료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회취법은 1533년에 하카타의 호상 가미야 주테이가 한반도에서 초청한 경수(慶壽)와 종단(宗丹)이라는 기술자에 의해 일본 내에서는 처음으로 이와미 은광에 도입되었다.”
일본이 근대에 경제 강국이 된 근저에는 이렇게 조선의 은 제련술과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 도공의 후예들이 개발한 도자기 제조 기술이 크게 한몫했다. 이때부터 교역에 눈을 뜬 일본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한 유럽 무역뿐 아니라 자력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해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다. 이후 상업과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고 도시화가 빠르게 진척되어 18세기에 벌써 도시 인구 비율이 중국이나 유럽보다 높았다. 에도(지금의 도쿄)가 인구 140만명으로 18세기 세계에서도 큰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전국 통일한 히데요시… 막부 직할로 은 생산, 임진왜란 전쟁비용 마련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은 일본의 은과 구리를 사서 오랜 기간 중국과 동남아에서 금으로 바꾸어 큰 시세 차익을 거두었다. 이로써 대자본을 구축할 수 있었다. 원래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교역은 처음에 중국 푸젠성 상인들과 포르투갈 상인들이 담당했다. 그러다 기독교 선교 문제로 문제를 일으키자 포르투갈 상인들이 축출되고 난 다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유대인들이 이 사업을 물려받았다. 근대 초 일본은 세계 2위 은 수출국이었다.
일본이 이렇게 은 수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독보적 은 제련술 ‘연은 분리법’ 덕분이었다. 조선의 은 제련술을 일본이 가져간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0년 전이었다. 첨단 기술 도입은 조선을 침략하는 발판이 되었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와미 은광을 막부 직할에 두고 은을 대량생산해 막대한 임진왜란 전쟁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 17세기 초 일본의 은 수출량은 연 200톤이었다. 당시 은은 세계 화폐였다. 이와미 은광은 19세기 후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채취되어 일본 부국강병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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