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성폭력범 와인스틴과 박원순… 둘을 다룬 전혀 다른 영화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2023. 6. 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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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와인스틴 성폭력 증언한 피해자의
용기 다룬 美 영화 ‘그녀가 말했다’
한국에서는 가해자를 두둔하는 영화 나와…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부끄럽다…
정치란 그렇게 추잡한 것인가

할리우드엔 ‘캐스팅 카우치(casting couch)’라는 은어가 있다. 여배우가 배역을 따내려면 제작자와 감독 같은 사람에게 성적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은 이 악습의 전형적 인물이었다. 그는 여배우는 물론 비서를 비롯한 직원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대가로 성폭력을 휘둘렀다.

와인스틴의 악행이 어떻게 세상에 드러나게 됐는지 그린 영화 ‘그녀가 말했다(She Said)’를 최근 넷플릭스에서 봤다. 작년 말 개봉하는가 싶더니 금세 스크린에서 사라진 영화였다.

/일러스트=이철원

와인스틴이 1990년대 초부터 온갖 성폭력을 저질러왔다는 사실을 뉴욕타임스는 2017년 10월 5일 자에 폭로했다. 이후 그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증언이 80건 넘게 터져 나왔고 그 시기는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 보도는 즉각 전 세계적 ‘미투 운동’으로 번져 일터에서 만연했던 성폭력에 경종을 울렸다. 와인스틴은 현재 23년형을 받아 복역 중이며 추가 기소로 16년형이 더해졌다. 만기 출소한다면 105세가 된다.

영화는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라는 두 여기자가 5개월 넘게 와인스틴의 범죄를 추적한 끝에 피해자들의 실명 증언을 허락받아 보도에 이르기까지를 다룬다. 2019년 두 기자가 출간한 같은 제목의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입을 다물거나 에둘러 말하거나 익명으로 말한다. 이유는 다양하다. 현장에서 저항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권력자와 싸울 자신이 없어서, 대중에게 선정적으로 소비되고 싶지 않아서다. 특히 여배우들은 이런 고발이 추문만 남기고 흐지부지 끝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추문은 그들의 밥줄과 직결된다. 이미 2010년 한 잡지에 와인스틴을 ‘영화계 유력 인사’로 묘사해 고발한 적이 있는 배우 귀네스 팰트로도 뉴욕타임스 취재에 응했으나 실명은 밝히기를 거부했다.

기자들은 어쩔 수 없이 와인스틴의 옛 직원들을 집중 취재한다. 그러나 이들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대부분은 돈을 받고 합의서를 써줬기 때문이다. 합의서에는 모든 민·형사상 문제 제기를 포기할 것과 “현존하는 언론사는 물론 앞으로 생겨날 언론사와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들은 합의금을 가해자에게 받는 일종의 사과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증거 능력을 빼앗기고 스스로 입에 재갈을 무는 것이었다.

수사기관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는 기자들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이들은 도널드 트럼프의 성추문을 폭로하는 기사를 쓰고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걸 목격했다. 강간해 죽이겠다는 협박 전화와 미행당하는 공포에 시달린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들의 기사가 대중의 무관심과 함께 묻혀버리는 일이다.

영화는 1990년대 와인스틴에게 성추행을 당한 배우 애슐리 저드가 자신의 이름을 쓰도록 허락하면서 급물살을 탄다. 책과 영화 제목 ‘She Said’는 극 중 대사 “이름 써도 된대요(She said, yes)”에서 따온 것 같다. 성범죄에서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입을 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함축하는 제목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다음 달 개봉한다는 ‘박원순 영화’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가해자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주장을 할 모양이다. 황당하게도 이 영화의 바탕이 된 책을 쓴 사람 직업도 기자다.

일터에서 벌어진 권력 관계에 의한 성폭력을 피해자가 고발하고 국가 기관이 확인했다는 점에서 와인스틴 사건과 박원순 사건은 본질적으로 같다. 서울시장 비서였던 피해자 역시 ‘나는 피해 호소인이 아닙니다’라는 책을 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피해자의 용기를 칭송하는 영화가 나오고 한국에서는 가해자를 두둔하는 영화가 나왔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는 건 바로 이런 일을 가리킨다.

와인스틴에게도 인정해줄 만한 면이 있었다. 그는 뛰어난 신인 배우와 감독을 발굴했으며 저예산 독립 영화를 한 장르로 만들었고 심지어 여성운동에도 후원금을 냈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당당해서 부끄럽다. 성폭력으로 고소당하고 자살한 사람을 ‘맑은 분’이라며 장례식 때 ‘임의 뜻 기억하겠습니다’ 하더니 전태일 열사 묘 뒤에 이장하고 영화까지 만들었다.

아이가 박원순 영화에 대해 묻는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정치란 게 그런 것”이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정치가 정말 그렇게 더럽고 추잡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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