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낫파더’의 시대

정상혁 기자 2023. 6. 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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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지옥圖 ‘친자 확인 쇼’
‘갓파더’ 알 파치노도 못 피해
한국과 무관한 딴 나라 얘기 아냐
“출산 시 통보 의무화” 요구도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You are… not the father.”

당신은 친부가 아니라고, DNA 검사표를 받아든 판사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통보한다. 남자는 주저앉으며 오열한다. 미국에서 시즌7까지 나온 TV쇼 ‘패터니티 코트’(Paternity Court)의 한 장면. ‘친자 확인 법정’이라는 제목처럼, 재판정처럼 꾸민 세트장에서 남녀 한 쌍이 아이의 생물학적 소속을 두고 진실 공방을 벌이는 예능이다. 인간 존엄성에 가장 치명적인 소재까지 예능화하는 미국의 개방성에 놀라고, 실로 분방한 일부 출연자의 생식력에 두 번 놀라며, 이와 비슷한 프로그램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사연마다 이런 막장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최고(?) 반전은 미국의 ‘모리 쇼’에서 나왔다. 한 여성을 둘러싸고 스튜디오에 등장한 전 남편과 현 애인. 현 애인은 전 남편 이전에 이 여성과 사귀는 사이였는데, 이혼 직후 재결합했으나 애매한 시기에 아이가 들어선 것이다. 한 살배기 소녀를 두고 “내 딸이 확실하다”며 신경전을 벌이던 와중, 전 남편의 DNA 검사 결과가 먼저 공개된다. “당신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현 애인은 희열의 세리머니를 펼치며 프러포즈 반지까지 건넨다. 하지만 잠시 후. “당신도 아버지가 아닙니다.” 오 마이 갓.

그냥 웃어 넘기기 힘든 이유는 이것이 남의 나라 이야기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청주에 사는 40대 남성이 쓴 글 하나가 온라인을 강타했다. 아내의 불륜을 확인하고 이혼 소송을 진행하던 어느 날, 아내가 병원에서 출산 도중 사망했다. 친자 확인 결과 ‘불일치’. 남편은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하지 않았고, 병원 측은 이 남성을 아동 유기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다는 황당한 사연. 어쨌든 현행 민법에는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고 적시돼 있다. 네티즌은 들끓었다. “아동 학대가 아니라 성인 남성 학대다.”

미국 예능 '패터니티 코트'에 출연한 남녀가 딸의 친부 확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평소 딸바보로 유명했던 남자는 곧 배반의 운명을 맞닥뜨린다. /MGM Studios

‘더 글로리’ ‘신성한 이혼’ ‘삼남매가 용감하게’…. 올해 방영된 한국 드라마만 봐도 ‘친자 불일치’는 기본 옵션이다. 드라마가 현실을 반영하는 건 오랜 전통. 뻐꾸기의 비애와 가정 파탄이 늘다 보니 “출생 시 친자 확인 검사를 의무화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의혹을 미연에 없애고, 갈등은 초장에 진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낡은 법 바꾸기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위에 언급한 ‘청주 사건’ 이후 변재일 의원은 “과학적 방법으로 친생자 판별이 가능해졌는데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현행법은 불합리하다”며 지난 3월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행법은 유전자 검사라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던 1958년 제정됐다.

오랜 세월 남성의 미덕은 의리였다. 의리는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낭만은 이제 사라졌다. 법조인·교육인·기업인 등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성 윤리는 처참한 수준이다. 배신이 거듭되면서, 판별은 간편해졌다. 돈 10만원이면 일주일 내로 확인이 가능한 세상이 된 것이다. 대법원 사법 통계에 따르면, 친생자 관계 존부 확인 소송 신청은 2002년 2588건에서 2022년 4665건이 돼 두 배 가까이로 늘었다. 그러나 어떤 의혹은 제기만으로도 큰 흉터를 남긴다. 결과와 상관없이 모욕감은 관계를 망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의리와 상남자의 상징, 영화 ‘대부’(The Godfather)의 대배우 알 파치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스물아홉 살 애인의 임신 소식. 믿기 힘든 일이기는 했다. 알 파치노는 여든셋. 게다가 미국 연예 매체 TMZ에 따르면, 임신이 어려운 의학적인 애로 사항까지 있다고 한다. 갓파더냐 낫파더냐.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의심을 택했다. 검사 결과는 다행히 비극을 피한 모양이지만, 불신이라는 지옥의 씨앗은 이미 싹을 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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