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몫”이라는 정부의 방조 속에 피해자 조롱·비판 ‘2차 가해’ 고통[잃어버린 집, 타버린 마음]

전지현·김송이 기자 2023. 6. 5.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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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 그들은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원인은 국가 정책의 실패인데
사기당한 사람 향한 시선 ‘싸늘’
적극적 피해 구제·재발 방지를

“엄마, 우리 집은 자가야, 전세야?”

인천 미추홀구에 거주하는 정진선씨(41)는 최근 초등학생 자녀의 질문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운이 좋게도 우리는 자가”라고 답했지만 당혹감을 지울 수 없었다. “한 다리 건너면 전세사기 피해자”라 해도 어른들의 얘기인 줄 알았는데, 아이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될 정도였나 싶었다.

정씨가 지난 3일 오후 인천 주안역 남광장에서 열린 ‘인천 전세사기 피해자 합동추모제’에 참석한 것도 ‘남 일 같지 않아서’였다. 올해 들어 잇따라 숨진 전세사기 피해자 5명의 빈 영정에 헌화한 정씨는 “한두 사람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이 무너졌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든, 누구든 당사자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세사기 피해자를 비난하는 여론도 적지 않다. “바보처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전세로 들어가 놓고선 왜 나라에 책임을 묻느냐”는 댓글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여론은 정부의 방조와 부추김으로 더 커졌다. 정부는 전세사기 피해가 ‘개인의 탓’이라는 태도를 고수해왔다. ‘사인 간 계약’에서 발생한 피해를 정부가 보상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형평성에 맞지도 않다고 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전세사기가 사회적 재난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별법이 통과됐지만 구제 대상인 피해자들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다.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달라”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사인 간 계약인데 왜 정부가 나서야 하냐’는 싸늘한 시선이 쏟아지고, 정부는 ‘개인의 몫’이라며 이를 방조하고 있다.

조롱과 방관 속에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낙담하고 있다. 경향신문이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39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30대 남성 A씨는 “세상 사람들은 사기당한 사람도 잘못이 있다고 조롱하는데, 과연 우리의 잘못일까. 내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누군가는 이 집에 들어왔을 텐데. 결국에는 피해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했다.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는 전세계약이 ‘사적 거래’라는 전제부터 다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전세시장은 전세자금대출 제도 등 정부의 주거정책 틀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며 “오랫동안 누적된 국가 정책의 실패로 보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피해 구제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여러 정부에 걸쳐 전세보증금 대출 상한이 올라가면서 ‘개인의 지불 능력’을 넘어 집값이 형성된 게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전세사기를 ‘남 일’이 아니라 ‘우리 일’로 바라봐야 피해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김윤태 고려대 공공정책대학 교수는 “‘개인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잘못된 전세 제도에 의한 피해자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는 우리 사회가 ‘연결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이 약화된 영향”이라고 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주택시장 전문가는 “특별법은 긴급조치일 뿐, 필요에 따라 시행령을 보완 개정해 허점을 메워 나가야 하는 시작 단계”라며 “피해자 구제책뿐 아니라 국가가 임대차 계약을 모니터링하는 등 전세 제도 전반을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전지현·김송이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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