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대책위 공동위원장 “특별법은 허울 좋은 보험상품…혜택받는 사람이 없다”[잃어버린 집, 타버린 마음]
국회 앞 농성장서 한 달간 생활
피해자 위로하며 특별법 제정 촉구
“정부 방치 속 경찰·시위대 대치
‘을 대 을’이 아닌 위를 비판해야”
“언제든 하소연하러 오세요. 커피라도 한잔 마셔요. 제가 프리허그 해드릴게요.” 무적씨(활동명)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안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대책위) 공동위원장인 그가 지난 5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캠프(농성장)에 거의 매일 나간 이유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모인 단체대화방에 ‘언제든 캠프에 놀러오시라’ 독려한 것도 그였다. “정말 힘들 때 말 한마디라도 하고 펑펑 울기라도 하면 고비가 넘어가거든요.” 무적씨는 경험담이라며 웃었다.
지난달 30일 무적씨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자기소개를 부탁한다’는 첫 질문에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무적씨는 “전세사기를 당한 이후, 지금껏 살아온 삶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며 “한마디로 뭐라 축약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8월, 서울 양천구의 보증금 3억100만원짜리 전세 오피스텔을 사기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특별법 초안의 피해보증금 기준(3억원)에서 100만원을 넘긴 액수였다. 통과된 특별법의 보증금 기준이 ‘5억원 이하’로 확대돼 겨우 피해자에 속할 수 있게 됐지만, 이미 전세대출만 2억원이 넘었고 수사는 개시되지도 않았다.
예술업에 종사하던 그는 6~7년 전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과 유사한 난치병을 앓고 있다. “불에 타는 듯한 작열감과 따가움에 괴로웠고 온몸에 진물이 났다”던 증상이 조금씩 호전될 때 전세사기를 당했다.
꼼꼼히 따졌지만 사기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입주 전 뗀 등기부등본에는 근저당이 없었다. 중개업자는 ‘100% 전세보증보험 되는 집’이라고 했다. 프리랜서인데도 순조롭게 대출이 나왔다. 무적씨는 “제1금융권에서 자료를 까다롭게 심사해 통과된 집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거듭 나오는 전세사기 뉴스에 불안해 등기부등본을 떼보니 집에 가압류가 걸려 있었다. ‘보증보험을 다 들었다’고 했던 임대사업자는 주택 임대차 계약 신고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2~3개월간 무적씨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빨간불엔 절대 길을 건너지 않을 정도로 바르게 사는 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자주 생각했다”고 했다.
지난 2월 인천 미추홀구에서 전세사기 피해자가 처음 극단적 선택을 한 후 그는 매 추모제를 빠지지 않고 찾았다. 작은 희망이라도 있었다면 외롭게 죽는 이들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란 마음에 대책위에 합류했다.
국회 앞 캠프에서 먹고 잔 한 달. 무적씨는 캠프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이 잊히지 않는다. ‘여의도 금싸라기 땅 위의 누더기 같은 천막 안’은 다른 세상 같았다고 했다. 그는 천막 안에서 “동료와 팔짱 끼고 걷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다시 저렇게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부럽다가도 ‘저 사람들은 사기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고 했다.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저도 전세 때문에 불안하다’며 상담을 청해온 경찰이 있었다. 이전엔 ‘경찰’과 ‘시위’를 두고 대치와 갈등, 충돌이 떠올랐지만 이젠 ‘을과 을’이 각자의 처지에서 어쩔 수 없이 부딪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됐다. 밤새 교대근무하며 캠프 앞을 지키는 경찰을 보면서, 그들이 ‘국회의 안전’이 아닌 ‘전세사기 피해자의 안전’을 지키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적씨는 “그들도 다 같은 서민이었다”고 말했다.
경찰과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물리적 충돌도 있었다. 지난달 23일 경찰과 국회 경호과가 시민 8000여명 서명을 국회 민원실에 전달하려던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출입문에서 저지하며 몸싸움이 발생했다. 무적씨는 “원래 성격대로라면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을 텐데, ‘저 사람들도 위에서 시키니 저러는 거겠지’ 싶었다”고 했다. 그는 항의하다가 물러섰다. “나 때문에 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더라”고 했다.
전국 각지에서 전세사기 피해를 일으킨 것도, 사기꾼들이 난립하게끔 판을 깐 것도, 피해자를 구제하겠다며 피해자를 걸러내는 법안을 내놓은 것도 모두 경찰과는 무관했다. 무적씨가 “비판은 위로 향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는 특별법을 들여다볼수록 ‘허울 좋은 보험상품’ 같다고 했다. “어떤 병이든 보장된다 하는데 뚜껑을 열어보면 받는 사람이 없는 그런 보험 있잖아요. 특별법으로 실제론 혜택 받는 사람이 없는데, 정부는 대단한 해결을 한 양 굴고 있어요.”
‘선 구제, 후 회수’ 등이 포함된 전세사기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차려진 국회 앞 캠프는 지난달 25일 특별법이 통과된 다음날 해단했다. 캠프는 해단했지만 무적씨는 여전히 바쁘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특별법 적용 대상인지 아닌지부터 혼란스러워한다고 했다. 정보 사각지대에 있는 피해자도 많다. 대책위 활동으로 미뤄온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그는 아직 날짜를 잡지 못했다. 피해자들이 눈에 밟힌다고 했다. 그는 “몸이 닿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것”이라고 했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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