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rory] 불황 그리고 명품

2023. 6. 5.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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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명품 브랜드의 전략적 요충지

경기 침체가 심각하다고들 한다. 그래서 다를 허리띠를 졸라매고 불필요한, 아니 써야 할 소비도 줄였단다. 특히 패션 명품 시장도 침체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팝업’, 그 ‘한정’의 의미가 주는 유혹
명품 브랜드가 카페 또는 레스토랑을 열고 손님을 받는 일이 꽤 많아진 요즘이다. 문전성시를 이뤘던 구찌의 레스토랑은 상시 열려 있고, 에르메스와 디올의 공간 역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와중에 ‘팝업’이라는 용어가 라이프스타일 트렌드의 최전선에 대두되면서 팝업 카페 혹은 팝업 레스토랑 형태의 임시 업장도 늘어나고 있다.
이코이 앳 루이비통 전경
명품 브랜드가 전면에 나선 ‘팝업’ 트렌드의 선두에는 루이 비통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이 비통은 유명 셰프 피에르 상, 알랭 파사르와 이미 두 차례의 팝업 레스토랑을 차린 바 있다. 그리고 최근 런던의 유명 레스토랑 이코이와 협업한 루이 비통의 3번째 팝업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이코이 앳 루이 비통’이 바로 그것. 지난 5월4일부터 문을 열었는데, 6월15일까지의 영업 기간 중 저녁 식사 자리는 이미 예약이 마감됐다. 예약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가보면 런치 코스, 디너 코스는 대기를 해야 하고, 가끔 오후 티 코스 정도만 예약이 가능할 정도다.
이 팝업이 정식 오픈하기 하루 전, 나는 루이 비통의 초대로 그 공간과 음식을 미리 접할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한 건 저녁 식사였다. 영국 이코이의 실력에 한국의 제철 재료가 훌륭하게 어우러진 맛있는 식사임은 틀림없었다. 테이블 위에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는 메뉴 하단의 가격을 흘끗 보았다. 디너의 경우 1인 식사만 35만 원, 여기에 와인 페어링을 곁들이면 다시 35만 원 추가. 도합 70만 원의 한 끼인 셈이었다. 이 가격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2시간 이상 지속되는 이코이 앳 루이 비통에서의 식사는 굉장히 훌륭했고, 동시에 신선한 경험이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하지만 가격을 상기하는 순간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이코이 앳 루이비통의 한우 스테이크
이번 팝업 레스토랑은 전석 매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는 팝업이라는 용어가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팝업이란 트렌드는 일종의 ‘한정’을 뜻하기도 한다. 불과 한 달 남짓 열려 있는 이 레스토랑은 런던 이코이와 하우스 브랜드 루이 비통의 전혀 다른 업종의 컬래버레이션을 경험할 수 있는 ‘한정판’ 개념이기 때문이다.
일찍 예약 전쟁에 뛰어들었든, 뉴스 기사처럼 웃돈을 주고 입장권을 샀든 간에 이 레스토랑을 경험할 수 있는 고객의 수는 일자와 좌석 개수만큼으로 제한되어 있으니까. 여기에서 ‘경험’이라는 단어는 명품 산업 또는 명품 소비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다. 그것을 위해 지금껏 많은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어왔고, 또 ‘한정적’ 경험을 더 열정적으로 소비해왔다.
팬데믹 보복 소비, 명품에서 해외여행으로
지난 3년여간의 팬데믹은 평소에 하던 많은 경험을 차단했다. 그 덕에 국내의 경우 명품 소비는 비이상적 신장을 거듭했다. 해외 여행이 차단되자 신혼 부부들은 여행 대신 더 등급이 높은 브랜드의 예물을 구입했다. 결혼 반지를 구매함에 있어 애초 고려했던 가격보다 더 높은, 더 비싼 명품 브랜드로 눈을 돌렸다는 의미다. 시계도 마찬가지고, 가방도 그렇다.
팬데믹은 소비자의 발을 집 또는 집 근처로 묶어버렸다. 그러자 예상외로 지출이 작아졌고, 더 좋은 제품을 집으로 들이기 시작했다. 가전 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재택 근무가 보편화되자 라이프스타일 형태 전반을 집에서 행해야만 했다. TV도 더 좋은 것으로, 냉장고는 더 큰 것으로 사야 할 것만 같았다. 밀키트와 배달 산업의 급성장도 자연스레 수반된 결과였다. 골프 산업의 눈부신 성장 역시 마찬가지다.
(좌)파리 라파예트 백화점
하지만 이제 팬데믹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하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팬데믹 기간 또한 명품 브랜드에 대한 일종의 보복 소비가 행해졌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열린 하늘 길은 여행을 다시금 자유롭게 했다. 발이 묶였을 때 제품을 사는 쪽으로 보복을 했다면, 이제 보복 행위는 무조건 ‘해외 여행’이 1순위로 자리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뉴스는 시작된다.
검색 창에 ‘명품, 불황’ 등의 단어를 넣어보자. 곧장 백화점 매출이 하락했고, 명품 시장이 위축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지난 3년간 말도 안 되는 명품 브랜드의 급성장을 봤다. 매 분기마다 소비자 가격이 평균 5~10%씩 오름에도 불구하고 명품 브랜드는 소리내지 못하는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시쳇말로 없어서 못 파는 제품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이 탓인지 인구 5000만 명 남짓한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 중 하나가 되었다.
사진 픽사베이
팬데믹 종식과 더불어 세계 최대 패션 그룹 중 하나인 LVMH 회장단이 한국을 찾았다. 대부분 명품 브랜드의 수뇌부들이 한국을 죄다 방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시장은 이제 그들에게 그 어떤 국가, 도시보다 중요한 곳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많은 매출을 만들어내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주요 전략지가 된 것이다.
엔데믹, 명품 소비의 공간이 해외로
다시 명품과 불황이라는 검색어로 돌아가보자. 이렇게 중요한 시장이 전년 대비 확연한 하락세를 보인다는 게 대부분 뉴스들의 골자가 된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금리가 계속 상승하자 우리네 은행들 역시 지속적으로 금리를 높였다. 한국에서 시작된 불황이 아니라, 전 세계적 불황의 시대인 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데믹 기간 대비 거듭된 매출 하락을 두고 소비자들의 명품 구매가 ‘뚝’ 떨어졌다는 건 직접적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소비자들이 명품 브랜드에 지갑을 완전히 닫았다고? 어불성설이다.
사진 픽사베이
이 원인은 앞서 말한 해외 여행에서 찾아야 한다. 나는 1개월 전쯤 오랜 만에 도쿄 출장을 다녀왔다. 달러, 유로, 파운드에 비해 엔화 가치가 절하되어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에 가면 똑같은 물건의 값이 한국보다, 아니 유럽보다도 저렴했다는 거다. 그리고 올 초부터 일본에는 한국 여행객들이 득실거린다고도 했다. 그 탓에 어떤 매장이든 아예 물건 자체가 없다는 소문도 돌았다. 한국 여행객들이 싹쓸이를 한다는 루머도 있었다. 매장에 직접 가봤다. 제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 인기 있는 제품들은 품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긴 했다.
유로 및 달러 환율이 높긴 해도 유럽 여행자들의 상황도 비슷하긴 하다. 한국보다 조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으니 이왕 간 해외 여행에서 명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솔직히 말해 한국의 명품 매장보다 물건의 수가 더 많으니 더 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점도 여행자의 명품 소비 비중을 높인다고 볼 수 있다.
사진 픽사베이
팬데믹 기간 동안 오로지 국내 매장에서 물건을 사야 했던 소비자들 대부분이 지금 해외 여행을 우선 목표로 하고 있다. 아니 이미 쇼핑을 위해 여러 차례 다녀온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 국내 명품 소비 시장이 작년 대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 탓에 어떤 백화점의 매출 신장률이 작년 30% 성장에서 올해 3% 성장으로 곤두박질 쳤다는 기사도 나온다. 팩트지만 그 원인을 찾는 데 있어 팬데믹과 엔데믹에 따른 변수를 따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외관적으로 내수 시장이 하락세를 타고 있는 건 틀림없어 보인다. 아직 정확한 집계치는 없지만, 그 내수 시장의 하락이 명품 소비 자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보이는지에 대해선 명확하지 않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해외 명품 매장에서의 (자국 세금을 여행객에게는 돌려주는 ‘택스 리펀드’를 위한) 한국 여권 제출이 굉장히 많다고 한다. 이 점 역시 명품 소비 자체의 감소가 아님을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다.
사진 픽사베이
그간 명품 브랜드들은 소비자층을 확장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팬데믹 이전에는 기존 고객과 VIP 고객 위주로 브랜드 전략을 펼쳤다. 팬데믹쯤부터는 취향을 존중하며 완전히 새로운 소비자로 등장한 MZ세대(특히 Z세대)를 사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래서 유명한 스트리트 브랜드와 협업을 하기도 했고, MZ세대에게 각광받는 디자이너 브랜드의 수장을 하우스 브랜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했다.
오프화이트의 故 버질 아블로가 루이 비통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고, 또 그가 스트리트 브랜드 슈프림과 협업을 일구어냈던 게 그 주요 사례다. 그때 우리는 명품 매장 앞에서 결코 볼 수 없었던 광경을 목도했지 않았던가! 슈프림에 열광하던 젊은 소비자가 루이 비통 매장 앞에서 캠핑을 하는 그런 장면 말이다.
이 외에도 많은 명품 하우스 브랜드들은 유사한 사례를 전략적으로 추구했다. 그래서 하우스 브랜드들은 기존과 달리 티셔츠, 스웨트 팬츠, 운동화 등의 (업계 용어로 ‘입문자’를 위한) ‘엔트리’ 제품을 불티나게 팔아왔다. 현재의 상황도 유사하게 유지되고 있다. 다만, 누차 말하듯 자유로워진 해외 여행으로 그 소비의 공간이 달라졌을 뿐이다.
한국, 명품 산업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
구찌쇼가 개최된 경복궁 근정전 전경
코로나 기간의 소비 형태 및 매출 신장을 통해 한국은 명품 브랜드들에게 굉장히 주요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과거처럼 결코 아시아의 변방 시장으로 평가절하할 수 없는 시장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베이징과 도쿄라는 지난 시대의 도시에 비해, 서울은 모든 면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보유한 매력적인 도시로 그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어쩌면 이와 같은 서울에 대한 이미지의 재고는 한국의 문화적 파워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에 기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K-팝은 BTS, 블랙핑크, NCT 등을 필두로 (기존 한류 시장이었던) 일본, 중국, 중동, 중남미를 넘어 북미와 유럽 대륙까지 점령해버렸다. 아니 전 세계의 새로운 소비자가 우리네 아이돌에게 열광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로벌 소비자를 사로잡는 데 이들의 문화적 파워는 필수가 됐다. 자연스럽게 아이돌들은 유명 브랜드의 앰배서더 계약을 체결했다. 동시에 OTT 플랫폼은 문화의 시공간적 제약을 깡그리 부셔버렸다. 한국 콘텐츠 시리즈를 실시간으로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가 확장되면서 을 필두로 한국의 영화와 TV 프로그램은 전 세계 소비자에게 결코 놓쳐서는 안될 주요 아이템이 되었다.
구찌 크루즈 24 초대장
이런 문화의 힘이 극대화되면서 서울은 명품 브랜드에게 더욱 더 매혹과 매력을 발산하는 도시로 다가갔음에 틀림없다. 최근 잠수교 전체를 런웨이로 활용하며 패션쇼를 개최한 루이 비통의 ‘2023 프리폴 컬렉션’의 영상은 전 세계로 송출됐다. 잠수교를 수놓은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이 참여한) 조명과 음악, 그리고 잠수교의 화려한 분수 쇼는 서울 시민인 나조차도 서울을 새롭게 돌아볼 기회를 제공받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글로벌 하우스 브랜드가 자신들의 쇼를 유럽 혹은 베이징이나 도쿄라는 전통적 아시아 도시가 아닌 서울에서 개최한 건 어쩌면 서울이란 도시의 역사성을 다시 한번 재고하게 만드는 큰 사건이라 칭할 수 있다.
한강 잠수교에서 열린 루이비통 2023 프리폴 패션쇼
심지어 그 쇼의 첫 테이프를 끊은 게 산울림의 ‘아니 벌써’와, <오징어 게임>의 여주인공이자 모델인 정호연이란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 컬렉션과 더불어 또 다른 명품 하우스 브랜드 구찌는 조선사를 관통하는 한국 역사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경복궁을 런웨이 무대로 공개했다. 이미 이들은 작년 겨울 이 쇼를 준비했지만 국내의 참사 사건으로 인해 부득이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잠수교에 이은 경복궁에서의 글로벌 브랜드 패션쇼는 해외 하우스 브랜드들이 한국 시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황과 명품 소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끊임없이 보도되는 경제 불황의 시대에 씀씀이는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골프 산업을 바라보면 그렇다. 팬데믹 기간 동안 국내 골프 (패션, 장비) 산업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시쳇말로 사람들이 모이면 골프 이야기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재의 골프 산업 전망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경험을 중시하는 MZ세대들까지 뛰어들었지만 이 스포츠에는 꽤나 많은 자본이 투여되어야 함을 몸소 실감했기 때문이다. 주말에 골프 한 번 치려면 평균적으로 30~50만 원에 가까운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비주얼 이미지를 중시하는 세대들은 이를 위해 고가의 의류도 많이 구매했다.
성수동 미스 디올 향수 전시 팝업
골프 산업은 블루 오션처럼 확장되었다. 하지만 비싸서 포기하고, 해외 골프가 다시 시작되고 있는 지금 그 바다는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다. 혹자는 절반 가까이 매출이 하락하고 있다고도 했다. 아무튼 명품 시장 역시 경험을 위해 많은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만큼 불황에 부담스럽긴 매한가지다. 아직까지 한국에서의 명품 소비는 쉬이 꺼질 불꽃은 아닐 것으로 예측된다. 국내 소비자들이 해외로 빠져나간 만큼, 국내로 유입되는 여행자들이 또 그 매장의 빈 곳을 채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대부분의 하우스 브랜드들이 한국을 전략적 요충지로 이미 확정한 만큼 이들의 한국에 대한 투자 또한 계속될 것으로 예측된다. 아무튼 한국에서의 명품 산업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 이주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이주영]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8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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