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영의 세상만사 <4>] 튀르키예 대통령 선거와 중동의 미래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2023. 6. 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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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 달러 대비 자국 통화가치가 40% 이상 하락하고 연간 물가상승률이 80%에 이르는 국가의 여당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튀르키예(옛 터키)에서 일어났다. 5월 14일(이하 현지시각) 치러진 튀르키예 대통령 1차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49.5%를 득표하면서 승리했다.

결선투표 없이 당선을 확정지을 수 있는 과반 득표에는 실패했지만, 선거 직전까지 야당 연합후보인 케말 클르츠다로을루에게 5%포인트 이상 뒤처진 것으로 나타나던 여론조사 결과를 고려해 보면 이러한 결과는 에르도안의 패배를 예상했던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단일 후보로 결집한 야권이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에 성공하고 에르도안의 20년 장기 집권을 끝낼 것이라는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기대는 좌절된 셈이다.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공학박사, 전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

이슬람 근간 전통 가치 VS 시장 자본주의

튀르키예 대통령 선거는 2023년 세계에서 치러질 선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선거로 여겨졌다. 2003년 이후 20년간 집권해 오던 에르도안이 계속 장기 집권할 수 있을 것인지와 더불어 올해로 공화국 건국 100주년을 맞이하는 튀르키예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선택하는 선거였기 때문이다. 튀르키예는 공화국 건국 이후 오랫동안 종교의 영향력을 엄격히 제한하는 세속주의를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채택했으며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기를 희망해 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슬람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세력을 확대해 오고 있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 세력은 이슬람을 근간으로 농촌과 도시의 빈민층을 규합하면서 튀르키예 전통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해야 함을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이스탄불을 비롯한 대도시 지역의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야당은 공화국의 건립 정신인 세속주의를 근간으로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를 강화하기를 희망해 왔다.

1차 투표 결과는 이러한 대립의 단층선을 뚜렷하게 보여줬다. 에르도안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과 북부 흑해 연안 지역에서 압도적으로 득표한 반면 클르츠다로을루는 이스탄불과 앙카라 등 대도시 지역과 대표적인 소수민족인 쿠르드족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득표했다. 튀르키예의 정체성을 둘러싼 지역 간 갈등이 뚜렷하게 나타나면서 앞으로 이러한 대립 구조를 어떻게 완화하고 통합할 것인지가 국가적 과제로 대두됐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불리해진 여론을 되돌리기 위해 최저임금의 대폭적인 인상과 같은 포퓰리즘적 정책 발표와 더불어 국가적 자긍심을 높이는 행사를 연이어 진행했다. 항공모함 건조 착수, 자국산 전기자동차 생산 그리고 원자력발전소 완공 등 대규모 프로젝트와 관련한 연속 행사를 통해 튀르키예 국민의 국가적 자존심을 자극하기 위해 노력했다.

에르도안 집권 이전까지는 불가능해 보이던 경제적·기술적 도약의 결과물을 보여줌으로써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고, 여기에 더해 인접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통해 커지고 있는 안보 우려에 대해 에르도안의 탁월한 외교력을 강조하는 전략이 먹혀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자 중동 3대 강국, 미국과 대립각

국제적으로도 튀르키예 대통령 선거는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곳에 위치한 튀르키예의 지정학적 특성과 에르도안 대통령의 외교 노선이 결합하면서 튀르키예는 국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3년부터 집권해 온 에르도안은 대외적으로 현란한 외교능력을 발휘하면서 튀르키예를 지역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튀르키예는 나토 회원국이지만 최근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러시아제 S-500 대공미사일 도입을 계기로 본격화된 미국과의 갈등은 최근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 신청에 대해 튀르키예가 스웨덴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더욱 노골화됐다.

튀르키예는 사우디아라비아, 이란과 더불어 중동의 3대 강국으로서 사우디와 견제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2017년 6월 사우디 주도로 UAE, 이집트 등 6개국이 카타르와 단교를 할 때 튀르키예는 부대를 파병해 카타르를 지원해 주면서 사우디의 영향력을 견제했다. 카타르는 2018년 튀르키예가 미국의 제재로 어려움을 겪을 때 180억달러(약 23조7798억원)를 지원해주면서 보답하기도 했다. 튀르키예는 카타르 이외에 홍해 건너편 수단,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에 군 기지를 건설하면서 사우디 견제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나서고 있다.

튀르키예는 역사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인 이란과 앙숙 관계이지만 미국의 이란 제재가 강화되면서 이란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란의 석유를 저렴하게 도입하는 대신 이란의 금융 창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란의 원자력 평화적 이용 권리를 지지하면서 이란에 대한 제재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튀르키예·이란·러시아 3자 정상회담을 통해 20년간 유효한 협력 협정 등에 서명하면서 이란과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나서고 있는 서방 측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도 튀르키예는 양측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흑해를 사이에 두고 이들 국가와 인접한 튀르키예는 전쟁 발발 이후 적극적으로 중재 노력을 기울이면서 흑해 지역의 세력 균형자로 역할을 해왔다.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바이락타르 무인기 개발과 긴밀하게 협력해 왔으며 대량의 무인기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고 있다.

금융 제재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러시아에 대해서는 투자와 송금 등의 창구 역할을 해주고 있으며, 러시아의 해외투자와 관광객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와 튀르키예는 역사적 앙숙이지만 미국과 유럽에 대한 튀르키예 국민의 반감이 증폭되면서 협력적 관계로 전환됐으며, 튀르키예는 러시아를 대서방 협상에 있어 레버리지로 활용하고 있다.

에르도안이 이끄는 튀르키예는 지난 20년간 상황 변화에 따른 능수능란한 입장 변화를 통해 자국의 이익 극대화를 추구해 왔다. 튀르키예 외교의 특성은 일관된 태도를 추진해야 한다는 강박과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 현재 상황이 중요하며, 최선의 이익을 위해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는 데 있어 거리낌이 없다. 튀르키예 외교에 있어 분명한 것은 자신들이 해준 것보다 반드시 더 많은 것을 얻어온다는 자세라는 평가도 있다. 지정학적 위치를 200% 활용해 자국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면서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 튀르키예의 외교 전략인 것이다.

대선 1차 투표 3위 후보 “에르도안 지지”

5월 28일 결선투표를 앞두고 1차 투표에서 5.17% 득표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3위 시난 오안 후보가 5월 22일 에르도안 지지를 선언했다. 민족주의적 극우 성향이 통한 것이다. 에르도안의 승리 가능성은 매우 크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에르도안의 연임 가능성이 커짐에 따라 미국과 유럽연합(EU)은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러시아와 맞서는 통일된 전선을 구축하고 싶지만, 핵심적인 튀르키예가 계속 모호하고 유동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결선투표에서 승리하면 아야 소피아의 이슬람 모스크 환원 등을 통해 노골화되고 있던 이슬람 근본주의 강화는 확실해 보인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셀주크 투르크가 동로마제국군을 격파하고 지금의 튀르키예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입했던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1000주년이 되는 2071년까지 이슬람 국가로의 복귀를 목표하고 있음을 밝혀왔다. 이는 튀르키예의 국부(國父)로서 존경받고 있는 무스타파 게말 아타튀르크가 내세웠던 세속주의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세속주의에 반하는 정치 세력이 강화될 때마다 쿠데타를 통해 개입했던 군부 세력은 지난번 쿠데타 실패로 인해 힘을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에 당분간 에르도안이 추구하는 튀르키예의 이슬람 국가화는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갈린 선거 결과가 보여주듯이 튀르키예의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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