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폐기장-양성자 가속기 연계’ 끝내 막지 못한 아쉬움이…

한겨레 2023. 6. 5. 17:1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길을 찾아서][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18화 핵폐기장과 양성자 가속기
2003년 3월25일 산업자원부 업무보고를 위해 걸어가는 윤진식 장관(왼쪽)과 노무현 대통령. 윤 장관은 훗날 이명박 정부에서 경제수석, 정책실장,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다. 퇴임 뒤 노 대통령이 “내 각료 중 나를 버리고 간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한 그는 최근 케이티(KT) 사장 공모에 응했다 탈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4월2일(수) 저녁 7시 서울 서초동 팔레스호텔 일식당에서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 박호군 과학기술부 장관,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김태유 청와대 과기보좌관과 식사를 했다. 윤진식 장관이 양성자 가속기 사업에 핵폐기장을 연계하는 안을 내놓았다. 핵폐기장을 받아들이는 지역에 양성자 가속기 사업 가산점을 주자는 것이다. 양성자 가속기 사업 주무 부처인 과기부와 의논 없이 불쑥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당연히 박호군 장관은 반대했고 옆에서 듣고 있던 나도 반대했다. 과기부에서 진행하는 양성자 가속기 사업의 1차 심사는 끝났고 곧 2차 심사와 최종 발표만 남았는데, 아무리 핵폐기장 유치가 어렵다지만 둘을 연계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연말까지 핵폐기장 위치를 정하라는 대통령 지시에 초조해진 산자부가 무리수를 두는 것으로 보였다.

화제를 돌려 진대제 장관이 전자정부 이야기를 했다. 전자정부 사업은 각 부처마다 각개약진하다 보니 이런저런 문제가 많다는 얘기였다. 윤 장관이 연구개발(R&D) 예산 중복문제를 제기하기에 내가 맞장구쳤다. 에너지전문가인 김태유 보좌관은 이라크 전쟁을 석유 수요자와 공급자의 대결로 해석하는 논리를 폈다. 한국경제는 유가가 배럴당 50달러까지 오르면 붕괴하기에, 미국은 옳고 전쟁도 옳다고 주장해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4월12일(토) 8시30분부터 대통령 없이 수석회의가 열렸다. 참여정부 50일간의 평가와 반성이 잘 요약, 정리돼 있었다. 김태유 보좌관이 전날 저녁 6시 관저 만찬에서 노 대통령과 과기부·산자부 장관, 정책수석, 자신이 핵폐기장과 양성자 가속기 사업의 결합 문제를 논의했는데, 대통령이 이 문제를 다음 국무회의 안건으로 올리도록 지시했다고 전했다.

이날 수석회의에서 권오규 정책수석이 철도청 해고자 복직 문제에 민정수석실과 정무수석실이 개입하는 것을 비판했다. 문재인 민정수석이 기분이 나쁜지 언성을 조금 높이며 반론을 폈다. 권 수석도 지지 않고 재반박했다. 내가 끼어들어 노동부가 보고하고 의논해야 할 청와대 부서가 다섯군데나 돼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른다고 하니 협상 창구를 단일화할 필요가 있겠다고, 권 수석 편을 들어줬다. 박주현 국민참여수석이 노동관련 여러 팀을 통합해 정책실이 주관할 것을 제의했다. 업무개선(PPR) 비서관실에서도 노동관련 업무의 중복문제를 지적하면서 개선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금 뒤 관저에 가서 대통령에게 몇가지를 보고했다. 청와대 빈부격차팀 구성을 놓고 정무수석실과 정책실 사이 의견 대립을 보고하면서 정무 쪽에 팀을 만들 것인지 대통령에게 여쭈니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인재 지역할당제가 장점이 있으나 과도하게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니 각종 고시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 도입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핵폐기장과 양성자 가속기 사업 연계안은 부당하니 국무회의 상정은 다음 기회로 돌리도록 건의했다. 비유하기를 입시 도중 입시과목을 추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단호했다. 양성자 가속기만큼 전국 어디에 가더라도 무방한 사업은 없다며 요지부동이었다. 계속해서 두 사안의 분리를 건의하자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며 “교수들은 대통령 머리 위에 올라타려고 그래요”라고 했다. 내가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정부와 대통령이 신뢰를 잃을까 봐 말씀드리는 겁니다”라고 했더니 대통령이 화를 다소 가라앉혔다. 거듭 재고를 요청하고 물러났다. 귀갓길에 박호군 장관한테서 전화가 걸려와 이 문제를 함께 걱정했다. 박 장관이 한번만 더 대통령에게 말씀드릴 수 없겠느냐고 하기에 더는 말 꺼내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2003년 3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산업자원부 업무보고를 받고 “지역간 분열과 갈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을 해소한다는 목표하에 단기적으로는 각 지역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장기적으로는 잠재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4월14일(월)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대통령 주재 수석회의가 열렸다. 아침 <한겨레>에 실린 장하성 고려대 교수(나중에 문재인 정부 정책실장)의 경제관료 비판 글과 박원순 변호사의 투명사회를 위해 청와대부터 예산공개를 솔선수범하라는 글에 노 대통령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적극 논박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서울 상암동 박정희기념관의 법적 문제점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정희기념관은 형식적으로는 국민모금으로 짓는다지만 실제로는 몇몇 재벌이 거액을 내고 금액을 채워 문제가 있었다. 실질로는 국민모금 방식이 아니었기에 지원해줄 수 없다며 참여정부에서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건립되고 말았다. 내가 한해 전 대구·경북지역 교수 3백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반대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던 사안이었던 만큼 결과가 그리되어 허무했다.

4월16일(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국무회의가 열렸다. 대표적 사회갈등 문제 25개가 소개됐다. 그중 하나로 17년째 표류 중인 정부 숙원사업 핵폐기장을 양성자 가속기와 연계하는 안건이 올라왔다. 산자부 대 과기부의 대결이었다. 연계하자는 산자부 주장에 대통령이 장관들 의견을 구했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회의를 마칠 즈음 노 대통령이 이 문제를 재차 거론하며 강하게 연계를 주장하고 난 뒤 장관들의 의견을 묻자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이 찬성 발언을 했다. 아무도 반대가 없어 연계안이 통과됐다. 내가 국무위원이라면 반대했을 텐데 모두 침묵을 지켰다. 정부가 공신력을 잃지 않을까 걱정됐다.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3대 요체로 병(兵·국방), 식(食·민생), 신(信·신뢰)을 들었다. 그중 하나를 버린다면 뭘 버립니까 물으니 병을 버리라 했고, 또 하나 버린다면 뭘 버립니까 물으니 식을 버리라 했다. 신뢰가 나라경영의 핵심이란 얘기였다.

4월17일(목)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대통령 주재 수석회의가 열렸다. 박주현 수석이 참여정부 수석회의 최초로 지각했다. 유인태 정무수석의 휴대폰 벨이 갑자기 울려 당황해하니 노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은 핸드폰 벨 울리는 걸 아주 싫어한답니다. 그러나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농담을 했다. 유 수석이 “저는 어차피 미국 못 가니 괜찮습니다”라며 농담으로 받았다.

오후 2시 나는 <뉴욕타임스> 하워드 프렌치 기자와 인터뷰했다. 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와 지역문제에 관한 질문이 많았다. 박정희 정권과 김대중 정권 때 전라도 지역 차별을 질문하길래 대답하려는데 옆에서 조인강, 조태열 두 국장이 너무 예민한 주제라고 답변을 만류해서 참았다.

양성자 가속기 사업과 관련해 예상대로 지방에서, 특히 대구와 강원도에서 강하게 반발했다. 4월24일(목) 오후 3시 조해녕 대구시장이 양성자 가속기 문제로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결국 양성자 가속기 건은 윤진식 장관의 승리로 끝났다. 윤 장관은 그 뒤 이명박 정부 인수위원, 경제수석, 정책실장을 거쳐 새누리당 국회의원을 두번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다. 퇴임 뒤인 2009년 3월 봉하에 뵈러 갔을 때 노 대통령은 “내 각료 중 나를 버리고 간 유일한 사람이 윤진식 장관”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여럿인데 왜 한명이라고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업자원부에서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터로 전북 부안군 위도를 확정해 발표한 2003년 7월24일 오후 부안 현지 주민들이 ‘반민주적 핵폐기장 최종확정 원천무효 대회’를 연 뒤 군청 앞까지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그 뒤 핵폐기장 문제는 2003년 7월 김종규 부안군수가 주민 동의없이 유치를 신청했다가 주민들이 들고일어나 살벌한 폭력사태가 벌어졌고, 주민투표에서 91% 반대로 부결됐다. 결국 2005년 말 정부가 3천억원 지원과 한국수력원자력발전 본사 이전이라는 인센티브를 내건 뒤 신청한 네개 지역 중 경주가 주민투표 90% 찬성으로 핵폐기장 부지로 선정됐고, 한수원과 양성자 가속기는 경주로 갔다. 20년 고투의 종착지는 고도 경주였다.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보관하는 경주 방폐장이 첫 가동을 시작한 2015년 7월13일 오후 경북 경주시 양북면 방폐장 지하 동굴 5번 처분고에서 방폐물 16드럼이 첫 처분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opinio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