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파동까지 불렀던 ‘대법관 제청’···김명수-윤석열 협의 어떻게 될까[뉴스 깊이보기]

이혜리 기자 2023. 6. 5.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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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실이 사실상 특정 후보를 찍어
배제를 시사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
편향적이지 않은 후보 임명하고 싶다면
추천위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
윤석열 대통령이 5일 인천 송도 센트럴파크 UN광장에서 열린 재외동포청 개청 기념행사에서 박수치고 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이 다음달 퇴임하는 조재연·박정화 대법관 후임으로 특정 후보를 제청할 경우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 보류할지를 대통령실이 검토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를 제청하기도 전에 대통령실이 사실상 특정 후보를 찍어 배제를 시사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에 대통령이 선제적으로 개입하는 셈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대법원은 법적 다툼에 대한 최종적 판단뿐만 아니라 사회의 규범적 가치와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누가 대법관이 되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대법관 제청의 의미와 역사를 통해 이번 논란을 짚어봤습니다.

■사법파동 계기된 ‘대법관 제청’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헌법 제104조2항은 1987년 개헌 때 제정됐습니다. 대법관의 제청·동의·임명의 주체를 대법원장·국회·대통령으로 삼분한 구조로 권력분립 원칙이 깃들어있는 규정입니다.

그 이전인 군사정권 때는 대법원장 제청과 대통령 임명 2단계로 돼 있었는데, 실질적으로는 대통령이 사실상 전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이후 대법원장 의사가 많이 반영되도록 바뀌었고, 그렇다보니 제청권을 별다른 견제 없이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제왕적 대법원장’의 문제점도 제기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법원의 관료화, 서열화입니다. 대법원장이 입맛에 맞는 사람을 대법관에 앉히니 일선 법관들이 윗선 눈치를 보며 줄을 선다는 것입니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 과정에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잇따랐습니다. 이에 대법원은 2003년 대법관 제청 자문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자문위 회의에서 위원인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박재승 대한변호사협회장이 위원직을 사퇴하고 퇴장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최종영 대법원장이 기존 관행에 따라 서열 위주로 정한 대법관 후보를 자문위에 통보했기 때문입니다. 박시환 당시 서울지법 부장판사(전 대법관)가 이에 반발해 사표를 내자 전국 법원의 단독판사들이 규탄하는 연판장을 돌렸습니다. 이른바 ‘4차 사법파동’입니다.

이런 소동을 겪으면서 대법관 제청 절차는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운영되도록 점차 바뀌어왔습니다.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에는 대법원장이 추천위에 선호하는 후보를 제시하는 권한을 전면 폐지하고 추천위가 스스로 추천 대상을 심사하도록 했습니다.

법조계에선 이번 대통령실의 특정 후보 배제 시사가 이같은 대법관 제청 제도가 변화해온 흐름에 역행한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편향적이지 않고 객관적인 대법관 후보자를 임명하고 싶다면 대통령실이 일방적으로 결정할 게 아니라 추천위와 같은 제도를 강화하는 게 맞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추천위가 더 깊이있는 토론과 검증을 통해 대법관에 누가 적합한지 가려낼 수 있다면 편향성 우려도 걷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국민의힘 윤리위원장을 맡고 있는 황정근 변호사는 지난 3월 법률신문 칼럼에서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 임명 과정에서 대통령과 국회 외에도 여럿이 함께 관여하는 것이야말로 헌법상 공화주의 정신에 부합한다”며 “이번 가을에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을 새로 임명하는 기회에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 추천·제청 제도를 도입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1월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이 신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인권법연구회 회원이면 편향적?

대통령실의 대법관 제청 거부 검토 이유는 ‘특정 이념 성향’으로 알려졌습니다. 여당은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이면 좌편향이라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해왔습니다.

물론 대법관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는 판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어떤 판결을 했는지, 사회이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꼼꼼히 따져보고 검증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법연구회·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이른바 이념적 편향성을 단정할 수 있을까요?

윤 대통령은 ‘특정 이념 성향’을 이유로 판사들 정보를 수집하고 불이익을 주려고 한 혐의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양승태 대법원 인사들을 수사하고 기소한 장본인입니다. 2018년 서울중앙지검장일 때 한동훈 당시 3차장검사(현 법무부 장관)와 함께 사법농단 사건을 수사했습니다.

검찰은 이 사건을 기소하고 공소를 유지하면서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이라는 이유로 판사들 동향을 파악한 것이 법관 독립을 침해해 위법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려고 한 것도 위법하다면서 ‘법관의 표현 및 연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공소장에 썼습니다. 법관들이 자유롭게 연구회를 선택하고, 연구하고, 연구결과를 나누는 것은 학문의 자유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된 다음 생각이 바뀌었을까요?

최근 회원수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2017년 기준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 수는 500명 가까이 됐습니다. 판사 6명 중 1명이 이 연구회 회원이었던 겁니다. 인사청문을 거친 여러 대법관·헌법재판관 후보자들은 우리법연구회·국제인권법연구회의 특정 이념 성향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인사청문회에서 김형두 헌법재판관은 우리법연구회·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출신이면 다 편향된 결정을 하느냐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질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아무리 어떤 연구회에 속해있다고 하더라도 판사가 객관성·공정성을 잃은 재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지난달 11일 오후 전원합의체 사건 선고를 위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앉아있다. 연합뉴스

■윤 대통령, 9월까지 버틴다?

대법원장이 제청도 하기 전에 대통령실에서 특정 후보 배제를 시사한 것은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규정하는 헌법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많지만, 대법원장의 제청 이후 대통령이 반드시 임명해야만 하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극단적인 경우 김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를 제청하더라도 윤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고 오는 9월까지 버티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있습니다. 김 대법원장이 9월 퇴임하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지명할 수 있기 때문에, 대법원장에 원하는 사람을 앉힌 뒤 그 이후 대법관 문제도 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대법관 2명의 자리가 최소 3개월간 공석이 됩니다. 오석준 대법관 인준안이 야당 반대로 표류하자 여당은 재판 적체 문제를 지적하며 신속한 인준을 촉구한 바 있습니다. 결국 오 대법관 인준안은 역대 최장인 119일만에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5일 논평을 내고 “대법원장이 최종 후보를 제청하기도 전에 불거진 대통령실의 특정 인사 배제 시사는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이자, 사법부 독립성을 침해하는 삼권분립 훼손 시도”라며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해 대법관 후보를 추천하기 위해 설치된 대법관 후보추천위원회를 무력화하는 시도”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대법관으로서의 자질과 책임에 대한 국회 검증과 동의 이전에 대통령실이 ‘코드’에 따라 임명권을 행사하겠다는 점에서 사법부의 독립을 훼손한다”며 “대통령실은 위헌적인 시도를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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