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겨냥 '디커플링 아닌 디리스킹' 공식화하는 미국 의도는
EU·영국·인도 등도 디리스킹 선호…中, 둘 다에 모두 반발
(서울=연합뉴스) 인교준 기자 = 미국이 중국을 겨냥한 전략 기조를 공급망 등 '디커플링'(분리)에서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제거)으로 전환을 공식화하는 모습이다.
대(對)중국 디커플링은 기존의 틀을 아예 바꿔 중국을 배제하자는 의미다. '대국굴기'로 타국에 '경제적 강압'을 하는 중국을 빼고 공급망을 재편해 사실상 '왕따' 시키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테러·돈세탁 제재와 관련해 주로 쓰였던 용어인 디리스킹은 중국발(發) 위험 요인 제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디커플링보다는 압박의 강도가 약하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4일(현지시간) 미 CNN 방송에 출연해 미국은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을 추구한다고 재차 밝혀 주목된다.
미국이 조 바이든 행정부 이후 대중국 디커플링에 박차를 가하면서 양국 간 갈등과 대립이 전방위로 확산하고 '미국·서방 대 중국·러시아' 구도의 '신냉전' 위기가 초래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미국도 방향 전환을 모색한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美의 中 겨눈 디커플링 흐름에 유럽 '제동'
중국과 관련해 디리스킹이라는 표현은 3월 30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함께 방중했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처음으로 썼다.
방중 당시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디커플링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중국으로부터 디커플링 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유럽의 이익에 들어맞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미국보다 더 긴밀하게 얽힌 EU와 중국 관계를 반영한 언급이었다.
이미 EU 이외에도 많은 국가가 디리스킹을 요구하고 있다.
S. 자이샨카르 인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17일 "세계 경제의 위험 제거(de-risk)도, 책임 있는 성장(responsible growth)이 가능하도록 보장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도 지난달 19∼21일 일본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G7의 대중국 연대는) 디커플링이 아니라 디리스킹에 관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미 지난 4월 27일 "우리는 디커플링이 아니라 디리스킹을 지지한다"고 밝힌 설리번 미 국가안보보좌관이 미국의 디리스킹 입장을 재차 언급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EU와 영국, 인도 등은 희토류·리튬 등 핵심 광물과 반도체 공급 능력을 바탕으로 경제적 강압을 가하는 중국에 대한 압박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 단절로 인한 피해를 우려해 미국보다는 중국에 대해 유화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으로서도 일정 수준의 정책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대국굴기 치닫는 中 견제로 시작된 美 디커플링
사실 미국의 대중국 디커플링 구상은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 2기 때인 2018년에 첨단제조업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겠다는 '중국 제조 2025' 프로젝트가 나온 것이 계기였다.
중국 당국이 2025년까지 첨단 의료기기, 바이오 의약 기술·원료 물질, 로봇, 통신장비, 첨단 화학제품, 항공우주, 해양 엔지니어링, 전기차, 반도체 등 10개 하이테크 제조업 분야에서 기술 자급자족을 달성해 미국을 제치고 제조업 초강대국으로 발전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트럼프 미 행정부는 이때부터 상당수 중국 수입품에 25%의 고율 관세를 물리는 무역전쟁을 개시했다. 중국 통신장비 기업 화웨이를 겨냥한 공격이 시작된 것도 이때였다.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도 미국은 한국·일본·대만과의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인 '칩4'를 통한 공급망 재편에 나섰다. 또 중국산 배터리 부품과 광물 사용에 불이익을 주는 내용을 담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제정했다.
게다가 미국은 첨단 반도체 제조는 물론 기술 습득의 싹부터 자르겠다는 심산으로 중국 반도체 산업을 압박했다. 여기에 미 행정부는 대만에 대한 무기 지원 확대로 중국에 맞섰다.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1년이 넘게 장기화하는 가운데 러시아 편을 드는 중국이 '비호감 국가'로 부각되면서 미국의 대중국 디커플링 압박은 강화됐다.
그러나 프랑스와 독일 등 EU 내 일부 회원국들이 바이든 행정부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미국은 기존 대중국 디커플링 정책을 재검토하는 모습이다.
특히 지난달 10∼11일 설리번 미 국가안보보좌관과 왕이 중국 정치국원의 오스트리아 빈 회동을 계기로 대화 국면이 조성됐다.
이후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중국을 겨냥한 디커플링이 논의됐으나, 디리스킹으로 가닥이 잡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정상회의 종료 후 기자회견에서 미중 관계가 "아주 조만간 해빙되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제 지난 4일 새라 베란 국가안보회의(NSC) 중국·대만 담당 선임국장과 함께 베이징을 방문한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의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중국 관영통신인 신화사에 따르면 리상푸 중국 국방부장도 이달 2∼4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 연설을 통해 "(미중 양국 간) 협력은 이로움을 주지만 싸움은 상처를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역시 해빙을 원한다는 얘기다.
中, 외견상 디리스킹에도 반발…미국의 노림수는
그러나 중국은 원칙 없는 미중 관계 회복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샹그릴라 대화를 계기로 미중 국방장관 회담을 하자는 미국 제안을 거절한 것도, 미 행정부가 리상푸 국방부장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불가하다고 밝힌 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라는 얘기다.
아울러 중국은 디리스킹과 디커플링 둘 다 별반 차이가 없다는 반응이다.
신화통신은 4일 논평을 통해 미국이 "기만적인 행위를 한다"고 규정했다. 디커플링이라는 단어를 디리스킹으로 바꾸는 것은 "오래된 와인을 새 병에 담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둘 다 중국을 봉쇄할 목적으로 "타국에 강요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자다오중 베이징대 교수(정치경제학) 교수는 "디리스킹과 디커플링 모두 다른 어떤 것보다 중국을 더 특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면서 "지켜봐야 할 건 (미국의) 구체적인 정책 변화"라고 진단했다.
앞서 지난달 유럽 순방 중에 친강 중국 외교부장은 EU가 디리스킹을 얘기할 때 "그 위험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면서 미국을 언급한 뒤 이는 결국 "신냉전의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베이징 소재 타이허연구소의 딩이판 세계 경제 전문가는 중국에 대한 EU의 디리스킹은 미국의 공격적인 접근보다는 방어적이라면서도,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변함이 없으며 단순히 수사적 변화로 중국은 이를 명확하게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중국 압박을 위해 동맹국과의 협력이 절실하고, 경제·안보 분야 이외로 확전을 꺼리면서 신냉전으로 치닫는 걸 방지하려는 미국으로선 현재의 디커플링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첨단 반도체와 핵심 광물 등을 겨냥한 경제·안보 분야의 핵심 이슈에 대해선 확실한 디커플링 노력을 하되 여타 나머지 분야로 갈등과 대립이 확산하는 걸 방지하려는 의도가 짙어 보인다.
이와 관련해 설리번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CNN에서 디리스킹이 "청정에너지 기술이나 반도체 등 핵심적인 물자에 대해 탄력성이 있는 공급망을 확보해서 우리가 한 국가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면서, "군사적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첨단 기술 보호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kji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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