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제력 잃은 공권력이 가져올 비극 [박찬수 칼럼]

박찬수 2023. 6. 5. 14:4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찬수 칼럼]자유로운 선거로 뽑힌 정부가 꼭 민주적이지 않다는 건 2000년대 이후에 세계 곳곳에서 입증되고 있다. 왜 보수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민주주의 퇴행의 우려가 커지는지 윤 대통령은 돌아보기 바란다. 도 넘은 경찰 대응이 내년 총선을 겨냥한 보수표 결집의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다고 해도, 적어도 <자유론> 에 심취했던 대통령이라면 지켜야 할 선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5월31일 전남 포스코 광양제철소 앞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던 한국노총 금속노련 김준영 사무처장을 경찰이 제압하고 있다. 경찰은 저항하는 김 사무처장을 길이 1m 플라스틱 진압봉으로 1분여간 내리쳤다. 한국노총 동영상 갈무리
박찬수 대기자

박찬수ㅣ대기자

경찰이 포스코 광양제철소 앞에서 고공농성하던 한국노총 간부를 곤봉으로 마구 때리며 진압하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전남경찰청은 “이 간부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저항해 부득이 경찰봉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농성 해산의 타당성은 차치하고라도, 이미 저항능력을 상실한 단 한 사람을 여러명의 무장 경찰관이 집단 폭행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자제력을 잃은 경찰력 행사가 과거에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 우리는 기억한다.

대통령 발언에 한술 더 떠 대응하는 경찰 수뇌부 태도로 보면, 앞으로 비슷하거나 더한 사건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1991년 4월의 명지대생 강경대씨 사망사건은 내무부 치안본부가 ‘불법·폭력 시위는 국가보위 차원에서 강력하게 대응하라’고 일선 경찰에 지시한 뒤 발생했다. 건물 옥상에서 농성하던 철거민을 이른 새벽 무리하게 진압하다 6명이 숨진 ‘용산 참사’가 일어난 건 14년 전 일이다. 권위주의 정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폭력’을 이유로 한 공권력의 무절제한 폭력 행사다. 여러 법률과 규정, 관행을 고치면서 이것을 제어해온 게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진전 과정이었다. 지금 그 고삐를 윤석열 정부가 다시 풀고 있다.

현 정부가 집회·시위에 강경 대응하는 근거로 드는 건 ‘시민의 불편’과 ‘불법·폭력성’이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시민의 자유를 볼모로 관행적으로 자행된 불법에 경찰로서 해야 할 역할을 당당히 하겠다”고 말했다. ‘시민의 자유’를 내세워 시민의 가장 중요한 권리인 집회·시위를 옥죄는 건 말장난에 불과하다. 우리 헌법은 집회·시위를 ‘허가받을 필요가 없는 기본적 권리’로 분명하게 규정한다. 집회·시위에 손쉽게 ‘불법’ 딱지를 붙이는 건, 사상의 자유가 있음에도 ‘불온한 사상’은 처벌하겠다는 반자유주의적 발상의 또 다른 사례다.

누군가의 시위가 다른 누군가에겐 불편함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현대 국가에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보장한 건, 다른 이에게 직접적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단순한 ‘불편함’을 이유로 규제하지 말라는 취지에서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약간의 불편함을 주며 공개적인 의사 표명을 할 수 있고, 이것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수렴하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경찰은 불법 집회·시위에 대해 엄정한 법 집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연합뉴스

경찰 과잉 대응의 맨 위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있다. 윤 대통령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라고 한다. 학창 시절 <자유론>을 읽고 감명을 받아 경제학과에서 법학과로 지망을 바꿨다는 얘기가 있고, “윤 대통령은 19세기 위대한 정치사상가인 밀의 <자유론>에 심취했던 터라 지도자로서 소양이 있다”는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의 찬사도 있었다.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이나 언급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밑바탕엔 <자유론>이 있다고 언론은 분석했다. 그런데 모든 자유 가운데 ‘의견 표명의 자유’가 핵심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 <자유론>을 왜 윤 대통령은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걸까.

밀은 집회·시위와 같은 의견 표명이 소수자나 약자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했다. 다수는 굳이 그런 방식을 택할 이유가 없다. 밀은 비록 소수의 의견 표명일지라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네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모든 의견은 설령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더라도 진리일 가능성이 있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해도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을 수가 있다. 따라서 대립하는 의견을 서로 부딪치게 하는 것만이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셋째, 설령 일반 통념이 전적으로 옳다고 해도 토론을 통해 활발하고 진지하게 다투지 않으면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합리적 근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편견에 빠져버릴 수가 있다. 넷째, 그런 주장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쇠퇴하면 사람들의 성격과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이것은 진심 어린 확신이 자라나는 걸 방해한다.”

자유로운 선거로 뽑힌 정부가 꼭 민주적이지 않다는 건 2000년대 이후에 세계 곳곳에서 입증되고 있다. 왜 보수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민주주의 퇴행의 우려가 커지는지 윤 대통령은 돌아보기 바란다. 도 넘은 경찰 대응이 내년 총선을 겨냥한 보수표 결집의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다고 해도, 적어도 <자유론>에 심취했던 대통령이라면 지켜야 할 선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pcs@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