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의 시론]文정권이 키운 ‘선거가족위원회’

2023. 6. 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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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논설위원
박정희 초도순시 막은 위원장
우여곡절 많았지만 성과 있어
文정권 특보출신 조해주 임명
내로남불·비례한국당 불허
아빠찬스 형아찬스 채용비리
감사원 감사로 비리 전모 규명

1963년 선거관리위원회가 헌법기관으로 발족한 이듬해 박정희 대통령은 선관위를 순시하겠다고 했다. 당시 대통령은 초도순시(初度巡視)라는 형태로 매년 각 부처와 지방을 찾는 관례가 있었다. 그런데 사광욱 초대 중앙선관위원장은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이 헌법상 독립기관을 순시해도 되느냐”며 순시를 거부한다. 취임한 지 불과 몇 달밖에 되지 않고 권력이 펄펄 살아있을 때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은 거의 직을 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사 위원장의 반대로 박 대통령의 ‘순시’는 무산됐다.

1963년 6월 5·16 쿠데타 세력이 헌법을 개정해 중앙선거위원회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 격하시키고, 선거 업무를 대통령의 통치 행위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을 때 사 위원장의 일갈은, 선관위가 민주적 선거를 정착시키는 데 밑거름이 됐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 경성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된 사 위원장은 해방 후 서울지법 부장판사, 고법 부장판사를 거쳐 1961년 대법원 판사에 재직하면서 선관위원장을 겸임했다.

1967년 보성군 벌교읍 공개투표 사건, 1987년 구로구청 부정투표 사건, 1992년 한준수 전 충남 연기군수와 이지문 중위의 관권선거 폭로 등 선관위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지난 제21대 총선 때의 부정선거 논란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고, 지난해 ‘소쿠리 투표’로 사무총장과 노정희 선관위원장이 사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선거 관리는 그래도 다른 나라의 모범이 돼 관리 기법을 수출하는 ‘선거 선진국’을 자부할 만했다. 정치권력과도 늘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그나마 중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선관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문재인 정권 들어서다. 2020년 3월 더불어민주당은 임기가 만료된 선관위원 자리에 김대년 전 선관위 사무총장을 앉히기로 야당과 합의했다가 돌연 번복했다. 30년 넘게 선관위에 근무하며 자타가 공인하는 베테랑이었던 김 전 사무총장은 2018년 정권의 실세였던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의 정치 후원금 ‘셀프 기부’를 위법으로 판단했다. 이 때문에 김기식이 낙마하자 보복을 한 것이다.

김 전 사무총장은 퇴임사에서 “차기 상임위원은 정치에 오염된 선관위 내부 출신이 아닌 덕성과 품성을 두루 갖춘 중립적인 외부 인사께서 오셔서 선관위를 더욱 발전시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정반대로 문재인 대선 캠프에서 특보를 지낸 경력(본인은 착오라고 주장)이 있는 조해주 씨가 임명됐다. 선관위원장이 비상임인 관계로 사실상 일인자인 조 상임위원이 임명되면서 편파성이 두드러졌다.

2020년 21대 총선 전 자유한국당이 위성 비례정당을 만들면서 ‘비례자유한국당’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선관위가 불허했다. 기성 정당과 헷갈릴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앞서 더불어민주당이 창당했을 때 기존 민주당이 반발했지만 선관위는 “유권자들이 민주당과 더불어민주당을 구별할 줄 안다”며 명칭을 허용했다. 2021년 4·7 재·보궐선거 때는 국민의힘이 ‘내로남불·무능·위선’ 등의 단어가 들어가는 현수막을 사용하려 했으나 “내로남불 등의 표현이 특정 정당을 유추할 수 있다”며 불허했다. 그러나 1년 뒤 대선 때는 사용이 가능하다고 입장을 180도 바꿨다.

이번 선관위의 ‘아빠 찬스’ ‘형아 찬스’ 채용에 대해 노태악 선관위원장만 모르고 선관위 내에선 다 알고 있었다는 얘기도 나올 지경이다. 노정희 전 선관위원장은 선거날 출근도 하지 않고 집에서 쉬고 있었고, 대법관을 겸임하고 있는 노태악 위원장은 선관위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선관위가 아니라 ‘선거가족위원회’가 된 지경인데도 말이다. 지금이라도 감사원 감사를 자청해 뿌리까지 썩어버린 조직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환부가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 확인하는 게 필수다. 명문화된 규정도 없는 대법관의 선관위원장 독식도 재검토해야 한다. 더 이상 허수아비 선관위원장은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민주주의를 유지 발전시키는 핵심은 선거의 공정성이다. 이를 맡은 기관의 부패가 만연한다면 누가 선거에 승복하겠는가. 이번 기회에 선관위 조직에 대한 전반적인 대수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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