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작품이야?’ 가끔 듣지만, 죽을 때까지 모험”

장재선 기자 2023. 6. 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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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작품이야?' 이렇게 묻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렇지. 아무것도 없는데 정상화 작품이라고 보는 게 이상하지."

프랑스에 있던 1980년대 초반, 전시를 위해 국내에 작품을 들여왔을 때 공항 세관원이 "작품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어떤 형상이 뚜렷이 보여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힌 말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이 눈요기의 시각적 효과를 넘어서 깊고 넓은 심상 세계를 담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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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세 단색화 대가 정상화 갤러리현대서 ‘무한한 숨결’ 전
캔버스에 고령토 얇게 바른 뒤
네모꼴로 뜯고 물감으로 채워
격자형 추상화로 ‘심상’ 표현
“뜯고 메우길 바보스럽게 반복
매순간 같지 않도록 작업했다”
정상화 작가는 자신의 작품 앞에서 “70년간 그림을 그려왔지만 지금도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글 · 사진 =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저게 작품이야?’ 이렇게 묻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렇지. 아무것도 없는데 정상화 작품이라고 보는 게 이상하지.”

‘정상화’와 ‘이상하지’의 운이 아재 개그 같아서 풀썩 웃음이 났다. 그러나 91세 노작가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미술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트리며 인내와 투지로 작업해 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나만의 작품을 만들었다”라고 했다.

1974년 작 ‘무제’. 완성된 캔버스 작품 위에 한지를 올려 흑연으로 탁본을 뜨듯 작업한 프로타주(frottage) 작이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 ‘무한한 숨결’을 지난 1일 개막한 정상화 작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그는 세계 미술계에 한국 단색화를 알린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국내 미술 평단뿐만 아니라 경매 시장에서도 이우환, 박서보 등과 함께 최상위로 인정받는다.

그도 젊은 시절엔 동시대 여느 작가들처럼 구상을 거쳐 앵포르멜(비정형 추상) 흐름에 섞였다. 40대에 달한 1970년대 이후로는 ‘뜯어내고 메우는’ 방법을 통한 격자형 추상 작업에 천착해왔다. 일본 고베(神戶·7년), 프랑스 파리(16년)에 머물며 세계 미술계의 경향을 다 훑은 후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것을 일관되게 가꿔왔다. 캔버스에 고령토를 3∼5㎜ 두께로 바른 후, 흙이 굳으면 직접 만든 뾰족한 칼로 네모꼴로 뜯어내고, 그 자리를 물감으로 메우는 방식이다.

그의 격자 추상화는 초기에 주변의 몰이해에 부닥쳐야 했다. 프랑스에 있던 1980년대 초반, 전시를 위해 국내에 작품을 들여왔을 때 공항 세관원이 “작품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어떤 형상이 뚜렷이 보여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힌 말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이 눈요기의 시각적 효과를 넘어서 깊고 넓은 심상 세계를 담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려준다. 그는 수행하듯 작업함으로써 ‘마음의 색’이 화면에 절로 배게 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 그래서 평론가 이일은 “정상화의 그림은 비길 수 없이 깊은 숨결을 내뿜고 있다”라며 “그의 회화는 네모꼴들이 빡빡하게 쌓이고 서로 인접하면서도 그 전체가 한데 어울려 무한히 확산해가는 공간”이라고 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세계관이 그 숨결의 무한함을 지향한다는 걸 보여준다.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작품 40여 점을 지하와 1, 2층 3개 관에서 선보인다. 지난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이 연대기적으로 작품을 보여줬다면, 이번 전시는 그의 창작 방법을 살피며 작품 본질에 다가가는 데 중점을 뒀다. 작품 하단 부분에 격자무늬가 없는 미완성작을 전시한 것은 그런 기획 의도를 뚜렷이 드러낸다. 그런 의도에 따라 화면 구축 방법을 살피면, 고령토와 물감을 들어냈다 메우는 과정에서 선, 면, 공간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자연스러움을 위해 작가는 반세기 넘게 노동 집약적으로 반복 작업을 했다. 격자의 모양과 크기, 안료 두께 등에 따라 ‘같으면서도 다른’ 평면이 나오도록 함으로써 ‘일관되고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하나하나 뜯어내고 메우는 행위를 반복하는 바보스러움으로 작업했다”면서도 “매 순간 같지 않으려 했다”고 했다.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끊임없이 실험해 왔음을 이번 전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목판, 한지 콜라주(collage) 작품뿐만 아니라 종이에 선을 그어 생긴 격자를 칼로 얇게 벗겨내 색을 칠한 데콜라주(d‘e collage)도 볼 수 있다. 캔버스 작품 위에 한지를 올려 흑연으로 탁본을 뜨듯이 만든 프로타주(frottage) 작품도 있는데, 작가 스스로 “참 힘든 작업”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엔 작업하다가 힘이 빠져서 손을 떨어트릴 때가 있다”면서도 “죽을 때까지 모험심을 갖고 끝까지 작업해야 작가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전시는 오는 7월 1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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