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살에 사전 읽던 천재, 과학을 재정의하고 떠나다 [홀오브페임]

박건형 테크부장 2023. 6. 5.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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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2023)쿤과 푸코를 연결한 과학철학의 거장, 과학과 인간을 보는 시선을 바꾸다

<홀 오브 페임(Hall of Fame)>

지구와 우리 삶을 바꾼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발자취를 다룹니다.

이들의 한 걸음이 인류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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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해킹 /토론토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19세기까지 과학자들은 과학이 점진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사고와 실험, 연구를 반복하고 그 결과물이 모여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이 미국의 과학사가 겸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Thomas Samuel Kuhn·1922~1996)이었습니다. 그는 과학과 철학 전공자들의 필수서적으로 꼽히는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발전은 기존 패러다임(paradigm)과 급진적인 패러다임의 충돌에 의해 혁명적으로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이 아이작 뉴턴의 역학으로 바뀌고, 다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역학으로 바뀌는 것처럼 새로운 과학은 기존 질서를 완전히 허물면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천동설을 대체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이런 쿤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지금은 거의 모든 학문에서 사용하는 패러다임이라는 용어와 개념 자체를 쿤이 만들었습니다.

다만 쿤의 이론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 패러다임을 대체하지만, 여전히 연속적인 요소들이 남아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역학 안에도 운동의 개념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 일부가 담겨 있는 식입니다. 쿤의 한계를 풀어낸 이론을 제시한 것이 바로 지난달 10일 세상을 떠난 과학철학자 이언 맥두걸 해킹(Ian McDougall Hacking)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입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28일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과학, 확률, 수학의 판도를 바꾸는 철학적 공헌과 인종, 정신 건강과 같은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 현대 사상의 거인”이라며 “여러 학문 분야에 걸친 그의 능력은 마치 지적 범위에 한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 해킹을 다룬 기사와 논문에는 ‘현존하는 최고의 사상가’라는 표현이 수식어처럼 등장했습니다.

토머스 쿤 /조선DB

과학철학은 과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과 자연은 과학과 어떤 관계인가를 탐구하는 심오하고 난해한 학문입니다. 과학철학뿐 아니라 인류학, 사회학, 역사학, 심리학 등에 걸친 해킹의 방대한 업적을 모두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해킹의 부고와 그의 책들, 각종 평론 등을 참조해 간략하나마 그가 남긴 발자취와 사상을 정리했습니다.

◇혼자 학제간 학과였던 인물

토론토대 철학과 셰릴 미삭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해킹은 혼자서 학제간 학과였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진정한 다리 건설자(true bridge-builder)’라는 별칭으로 불렸습니다. 그만큼 여러 영역에 걸쳐 영향력을 미쳤다는 얘기입니다. 해킹은 ‘과학 혁명의 구조’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논픽션 책 100권 가운데 한 권으로 꼽힌 ‘우연을 길들이다(The Taming of Chance)’를 비롯해 표상하기와 개입하기, 확률과 귀납논리, 미치광이 여행자 같은 수많은 명저를 저술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합니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저서 ‘확률의 출현(The Emergence of Probability)’은 이후 수백권의 책에 영감을 줬다”고 했습니다.

이언 해킹의 대표작 '우연을 길들이다' /아마존

그렇다면 과연 해킹은 어떤 방식으로 철학과 과학에 접근했기에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노르웨이 베르겐 대학의 라그나 피엘란드와 로저 스트랜드는 해킹이 인문·사회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홀베르그상을 수상했을 때 “‘과학은 인간의 사업’이라는 한 가지 사상이 그의 모든 저작을 관통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해킹은 2012년 퍼블릭 컬처 저널 인터뷰에서 “과학은 항상 역사적으로 만들어지며 현재의 과학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실하거나 확인됐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출현의 맥락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해킹의 연구는 1990년 무렵을 기점으로 나뉩니다. 전기에는 쿤의 영향을 받아 과학철학적 접근을 깊이 있게 다뤘습니다. 해킹은 ‘과학 혁명의 구조’ 2012년 개정판 서문의 첫 문장에 “위대한 책은 드물다. 이 책은 위대한 책이다.”라고 썼습니다. 또 “이 책이 실제로 ‘우리가 지금 홀려 있는 과학의 이미지를 바꾸었다’는 점이다. 영원히.”라고 칭송했습니다. 후기에는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철학자이자 인문학과 인간에 초점을 맞췄던 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t·1926~1984)의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해킹은 쿤과 푸코를 연결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물리학·천문학·화학 같은 쿤의 과학들과 심리학·의학을 다룬 푸코의 인간사회를 결합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죠.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1984)/조선DB

◇ “과학에는 단절과 연속성이 동시에 존재”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쿤은 과학이 패러다임의 충돌을 통해 혁명처럼 발전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방식이라면 과학은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해킹은 여기에 연속성을 부여합니다. 이른바 ‘추론의 스타일(style of reasoning)’이라는 개념입니다. 과학사학자 앨리스터 크롬비(Alistair Cameron Crombie·1915~1996)가 제시했던 ‘사고의 스타일’을 토대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킹은 패러다임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연속적인 요소들을 ‘스타일’로 설명합니다. 과학에는 수학적·실험적·확률적·분류적·통계적 같은 다양한 스타일이 있고 이 스타일은 한번 만들어지면 잘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수학적 스타일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등장했지만 오늘까지 남아있고, 실험적 스타일과 확률적 스타일은 17세기 과학혁명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실험과 확률은 오늘날에도 과학의 핵심 방법론으로 사용됩니다. 뉴턴이나 앙투안 라브와지에가 하던 실험을 여전히 과학자들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370만달러(약 44억원)에 낙찰된 아이작 뉴턴의 과학책 ‘프린키피아’. 왼쪽 사진은 뉴턴의 초상화.

분류적 스타일은 18세기 생물학의 급격한 발전과 함께 등장했고, 통계적 스타일은 19세기에 등장했습니다. 해킹은 이런 주장을 통해 과학에는 단절뿐만 아니라 지속성과 연속성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봤습니다. 또 해킹은 과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론보다 실험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실험 철학을 주창했는데, 과학철학자 사이에서 실험실재론(experimental realism)이라고 불립니다.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는 “해킹이 쓴 ‘표상하기와 개입하기(자연과학철학의 입문적 주제들)’는 과학철학을 다루는 과학학(Science Studies)이 과학이론에서 실험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해킹은 실재의 정의에 대해 쿼크와 전자를 예로 들었습니다. 쿼크와 전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은 실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물리학자들의 이론적 구성에 불과한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 해킹은 “실험을 통해 밝혀진 현상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스탠퍼드대에서 전자와 양전자를 니오븀 공에 분사해 전하를 감지하는 실험을 언급하며 “전하를 뿌릴 수 있다면 전하는 실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과학이 인간의 범주와 분류를 만들어냈다”

해킹은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범주와 분류를 만들어냈다고 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여러 논쟁적인 주제를 다룹니다. 아동학대와 다중인격, 자폐 스펙트럼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는 흔히 정신질환자는 정상인과 다른 사람으로 봅니다. 하지만 정상인과 정신질환자를 가르는 기준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 것일까요.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기존에 없던 기준을 만들고 이를 통해 사람을 분류하면서 범주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해킹의 주장입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아동학대자와 피해아동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개념이 생긴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이전부터 있던 아동학대자와 피해아동을 뒤늦게 발견한 것일까요. 누군가 연구를 통해 이런 개념을 만들어냈고, 아동학대자와 피해아동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사람도 생겨났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해킹은 1995년 저서인 ‘영혼을 다시쓰다(Rewriting the Soul)’에서는 다중인격을 다룹니다. 다소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 성격이 급격히 변하는 사람은 예전부터 수없이 있었지만 정신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다중인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면서 이들 중 일부가 정상인과 완전히 다른, 다중인격이라는 질환을 앓는 사람으로 분류됐다는 겁니다. 진단의 기준이 점점 복잡해지고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면서 같은 다중인격 질환자 안에서도 세분화가 이뤄지며 전체 다중인격 분류에 속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집니다. 분류의 탄생으로 마치 새로운 사람이 등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범죄 청소년 같은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중인격을 다룬 이언 해킹의 저서 '영혼을 다시 쓰다' /아마존

인간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원래 없던 범주를 만들고, 이를 통해 사람을 분류하고 계량하면서 원래 없던 인간유형(kinds of people)들을 만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과 타인을 구별짓는 인식의 방식으로 삼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면서 다시 이론적 개념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해킹은 이를 ‘고리효과(루핑 효과·looping effect)’라고 했습니다.

◇ “반드시 이상한 것을 장려하라”

그는 “정신건강에서 정상이라는 단어는 사실과 가치를 연결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만큼 오래된 힘을 사용해 정상적인 것이 옳다고 귀에 속삭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반드시 이상한 것을 장려하라. 이상하다는 것을 절대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일시적인 정신 질환이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1998년 발간된 ‘미치광이 여행자’라는 책에서 그는 1880년대 유럽에서 유행한 강박적 방랑을 얘기합니다. 이국적인 풍광에 열광하며 여행에 빠진 중산층 남성들은 당시 정신질환으로 여겨졌지만, 열풍이 지나가자 이런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인간과 과학이 만들어낸 정신질환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지적한 셈이죠. 1995년 런던 리뷰에 쓴 글에서는 다중 인격 장애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다중 인격이라는 질환이 정의되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 범주에 포함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리성 정체장애라는 이름으로 진단병이 바뀌자 또 다른 사람들이 범주에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이언 해킹 /제인 해킹

해킹은 1936년 2월18일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밴쿠버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캐나다 육군에서 복무한 공로로 영국제국 훈장을 받은 해롤드 해킹이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3~4살 때 앉아서 사전을 읽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고 했습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한 그는 1962년 영국 케임브리지 트리니티칼리지에서 과학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뉴욕타임스는 “해킹은 은퇴 뒤에도 트레이드 마크인 경이로움을 유지했다”고 했습니다.

2004년 캐나다 훈장, 2009년 노르웨이 홀베르그상, 2014년 발잔상을 받았고 2006년에는 프랑스 최고 학술집단인 콜레주 드 프랑스 의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딸인 제인 해킹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이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입을 모읍니다.

※참고문헌

확률과 귀납논리/이언 해킹/박일호·이일권 옮김/서광사

미치광이 여행자/이언 해킹/최보문 옮김/바다출판사

네이버 ‘과학으로 생각한다’ 이언 해킹/홍성욱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34143&cid=60278&categoryId=60278

이언 해킹/조영호

https://www.youtube.com/watch?v=u5mO6mXZnlw

홀베르그 위원회

https://holbergprize.org/en/holberg-prize/about-ian-hacking

뉴욕타임스

https://www.nytimes.com/2023/05/28/science/ian-hacking-dead.html

글로브 앤드 메일

https://www.theglobeandmail.com/canada/article-philosopher-pondered-the-reality-of-particles-and-the-labelling-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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