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어떤 형사사법의 실패-최말자씨의 경우

기자 2023. 6. 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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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는 복수 대신 재심 청구로
무고함 밝혀 달라고 호소할 뿐이다
형사사법이 또 실패해선 안 된다
대법원이 재심사유 폭넓게 해석해
최씨에게 법의 구제가 주어져야

최근 대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인 최말자씨의 사연을 언론 보도에 따라 재구성하면 이렇다.

제사떡을 주려고 최씨(당시 18세) 집에 온 친구들을, 생판 모르는 남자(노모씨, 당시 21세)가 쫓아왔다. 친구들이 “저놈을 보내야 집에 간다”고 하는데, 남자가 길을 알려 달라고 했다. 최씨 혼자서 남자를 큰길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그가 갑자기 최씨를 덮쳐 최씨는 돌에 머리를 부딪혔다. 남자는 도망가는 최씨를 세 번 넘어뜨려 끝내 올라탔고, 최씨가 저항하면서 남자의 혀를 깨물어 그의 혀가 1.5㎝ 정도 잘렸다. 얼마 후 남자는 다른 남자들과 패거리를 지어 최씨 집을 찾아와 칼을 책상에 꽂는 등 행패를 부렸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최씨는 성폭력 피해 사실로 그를 고소하고 경찰에서 정당방위를 인정받았으나, 검사는 최씨를 불러 “못된 년, 네가 계획적으로 그랬지?” 운운하며 당일 구속했다. 검사는 최씨를 중상해죄로 기소하는 한편, 구속되어 있던 노씨를 석방하면서 특수주거침입죄와 특수협박죄로 기소했다. 기이하게도 성폭력 사실은 기소되지 않았다. 최씨의 부친은 노씨의 강압에 못 이겨 치료비를 주고 중상해죄에 대한 합의서를 받았다. 판사는 심리 중 최씨에게 성관계를 해 보았냐, 도의적 책임이 있지 않냐, 노씨와 결혼하면 어떠냐 등 해괴한 언사를 농하고 순결성 신체감정까지 받게 하더니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고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면서, 노씨에게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때까지 최씨는 6개월간 구속되어 있었다. 1964년의 일이다. 최씨는 2020년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되자 대법원에 재항고를 했다.

재심 사유는 제한적으로 규정되어 있어 인정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재심 사유가 인정되면 재심이 개시되어 심판 절차에 들어가지만, 인정되지 않으면 거기에서 절차가 끝난다. 최씨 사건에서는 재심이 개시되지 않았다. 재심 사유에는 오류형(원판결의 증거가 허위임)과 신규형(원판결의 사실 인정을 변경할 새로운 증거가 있음)의 두 가지가 있다. 사건에 관여한 경찰관, 검사, 판사가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해 증명된 경우 또는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으나(공소시효가 완성된 경우가 그 예다)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사실이 증명된 경우도 오류형 재심 사유로 분류된다.

재심 사유가 인정되는지 여부에 관하여 1심과 2심은 노씨가 재판 후 징병 신체검사에서 1등급 판정을 받아 베트남에 파병된 사실이 있어도 혀 절단으로 발음 장애가 있었던 이상 여전히 중상해에 해당하므로, 무죄 등을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검사의 불법구금 사실 등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고, 판사의 재판 진행도 성차별이 뿌리 깊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지금의 잣대로 범죄가 된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문제는 또 있다. 원판결이 있었던 사건의 기록이 보존기간 만료로 이미 폐기되었다. 하지만 최씨와 노씨에 대한 판결서는 보존되어 있고, 당시 사건을 상세히 보도한 부산일보 기사도 있으니, 여기에 재심 청구 시 제출된 진술서 등 자료를 더하여 최씨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해석하면 필요한 사실관계를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노씨의 행위 중 성폭력 부분에 대한 검사의 조처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사건 전체의 경위가 그러하니, 검사로서는 최씨가 상해를 입었는지 더 조사하고 노씨를 강간미수죄나 강간치상죄로 기소했어야 옳다. 검사의 공소 부제기는 직무유기죄에 해당하고 이는 재심 사유에서 말하는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편 형사소송법에서 말하는 ‘확정판결에 대신하는 증명’을 각종 진상규명위원회나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결과, 경찰 등 국가기관의 조사결과로 한정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위원회가 관할하지 않는 사건에서는 당초에 그런 조사를 받을 수 없고, 경찰 등 국가기관이 모든 사건에서 이런 조사를 해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대법원의 결정으로 재심이 개시된다면, 이어질 심판절차에서 무죄 판결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대법원은 1989년 성폭력을 방어하려고 범인의 혀를 깨물어 절단한 여성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판결한 바 있다.

형사사법에서 말하는 정의는 본질적으로 공적 복수다. 형사사법 제도는 그 공적 복수에 대한 약속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고 진짜 피해자가 처벌받는 세상에서는 사적 복수 외에 해결책이 없다. 형사사법의 실패다. 최씨는 복수를 택하지 않고, 재심 청구로 자신의 무고함을 밝혀 달라고 호소할 뿐이다. 이제 형사사법이 또 실패해서는 안 된다. 대법원이 재심 사유를 좀 더 넓게 해석하여 최씨에게 법의 구제가 주어져야 옳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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