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거대 정당의 몰락

이선정 기자 2023. 6. 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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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총선 전진당 1당 파란, 군부-탁신 ‘독과점’에 경고
佛공화·사회당도 쇠락의 길…국힘·민주당 반면교사해야

올해 상반기 가장 인상적인 국제뉴스를 뽑으라면 태국 총선을 들 수 있겠다. 지난달 14일(현지시간) 치러진 태국 총선에서 진보정당인 전진당이 제1당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전진당의 승리는 지난 20년간 계속된 군부와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지지세력 간 ‘뺏고 뺏기는’ 양분 구도를 깬 일대 사건으로 평가된다. 공고하기만 했던 이들 두 세력을 무너뜨리고 태국 정치지형도 자체를 바꾼 것이다.

전진당은 왕실모독죄 폐지 같은 군주제 개혁과 징병제 폐지, 동성 간 결혼 허용 등 파격적 공약을 내건 신생 정당으로 창당 2년 만인 2020년 해산된 중도좌파 신미래당의 후신이다. 전진당 승리엔 당 대표인 피타 림짜른랏(42)의 역할이 컸다. 미국 하버드대 출신의 40대 엘리트인 그는 준수한 외모와 언변으로 ‘아이돌’급 인기를 얻으며, 태국 정치개혁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정치신인인 피타가 내세운 개혁 정책은 쿠데타 세력인 군부와 탁신 일가 간 반복되는 권력싸움에 신물이 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낡은 군주제, 왕실의 묵인 하에 반복되는 군부 통치, 탁신 일가 등 특정 세력 독과점 방식의 지배에 반감이 강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태국 국민은 피타의 전진당에 열광했다.

전진당 돌풍은 변화를 향한 갈망이란 점에서 2020~2021년 태국 민주화운동의 맥을 잇는다. 레드불 창업주 손자의 ‘유전무죄’ 등이 촉발한 민주화운동에서 민중은 “주권은 왕실이 아닌 국민에 있다”며 ‘반군주 반군부’ 목소리를 키웠다. 왕실모독죄 폐지를 외치면서 국왕 라마10세에 대한 반감을 노골화했고, 2014년 쿠데타로 정부를 장악한 현 군부정권의 종식을 촉구했다. 이번 총선에선 ‘반탁신’ 기류도 세졌다. 재벌 출신인 탁신 전 총리는 부정부패로 해외 도피 중임에도 지난 20년간 정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2001년 집권해 2006년 쿠데타로 축출된 그는 매제인 솜차이 웡사왓이 2008년,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 2011년 총리가 되면서 세를 유지했지만 2014년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밀려났다. 이번 선거에선 탁신 전 총리의 막내딸인 패통탄 친나왓(36)을 앞세워 부활을 꿈꿨으나 탁신계 프아타이당은 141석을 얻어 피타의 전진당(151석)에 뒤졌다. 탁신계 정당이 2001년 이후 선거에서 1당 자리를 뺏긴 건 처음이다. 이처럼 올해 총선에선 태국 정치를 양분했던 세력의 ‘균열’이 뚜렷했다. 여지껏 ‘친서민 반군부’가 경쟁력이었던 탁신 계열은 더 강력한 반군주 반군부를 주장하는 신당에 밀렸고, 정권을 장악한 군부 지지세력의 성적표(팔랑쁘라차랏당과 루엄타이쌍찻당 각각 40석, 36석)는 더 초라했다.

상원을 장악한 군부의 동의 없이는 피타 대표가 총리가 될 수 없고, 선관위가 피타의 총선 출마 자격을 두고 조사에 착수하는 등 내달 총리 결정을 앞두고 벌써 견제가 상당하다. 연정 구성 과정에서 군주제 관련 내용이 이미 빠지는 등 개혁 완수의 길은 험난할 전망이지만, 기성세력이 분노한 민심에 강하게 반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총선은 의미있는 전진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성정당이 쇠락한 사례는 프랑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현대정치사를 양분했던 우파 공화당과 좌파 사회당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등장을 기점으로 뚜렷하게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좌우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정치를 표방하는 신당(현 르네상스당)을 이끄는 마크롱 대통령이 2017년 당선되면서 프랑스 정치지형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고, 작년 4월 선거에서 재선까지 성공하면서 거대 양당 중심의 정당체계 붕괴에 쐐기를 박았다. 작년 4월 대선에서 공화당과 사회당 후보는 극우 후보에 밀려 결선투표에는 가보지도 못한 데다 1차 투표 당시 득표율이 각각 4.78%, 1.75%에 그쳐 충격을 줬다. 각 당 역사상 가장 낮은 득표율이었다. 마크롱 이전의 5공화국 대통령 7명 중 공화당은 5명, 사회당은 2명을 배출하며 주류정치를 이끈 전통의 양당이 이제는 극우·극좌 정당에도 밀려난 처지가 됐다.


한국 정치는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양분한다. 대통령이 속한 국힘은 미국 정부의 도청 파문이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해법,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시찰 등 잇단 굴욕·친일외교 논란에도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코인 돈봉투 등 여러 사건에 휘말린 민주당의 헛발질 덕택이다. 거대 양당 체제는 정치가 바람에 과도하게 휩쓸릴 수 있는 부작용을 줄이는 긍정적 면도 있지만, 서로 더 잘하기보다 상대방이 잘못하면 내가 돋보이므로 네거티브에 집중하게 되는 점은 약한 고리로 지적된다. 그러나 네거티브의 악순환, 그로 인한 정치혐오를 즐기고 이용하지 말라고, “이러다간 다 죽는다”는 위기감을 가지라고 민심은 준엄하게 경고한다. 거대 양당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나면 새 인물, 제3의 길을 향한 열망이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태국과 프랑스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선정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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