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소리] 미쉐린의 도시에서 ‘No Star’를 외치다
초등학교 3학년 봄 소풍 때의 일이다. 반 친구들이 모두 잔디밭에 빙 둘러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와! 여기저기서 아이다운 탄성이 터져 나오고, 달달하고 고소한 냄새는 두둥실 우리 곁을 에워쌌다. 바로 그때 들려오던 선생님의 목소리.
“어머나! ○○이 김밥 안에는 한우 소불고기가 들었네. 우리 반에서는 ○○이 어머니가 자식을 제일 사랑하시는구나!”
이야기의 주인공이던 ○○이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선명한 것은 햄과 단무지, 맛살과 오이가 든 김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어린 시절의 나, 그리고 자신이 ‘자식 사랑’ 심사에서 탈락하게 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새벽부터 김밥 말기에 여념이 없었던 엄마의 분주한 손놀림이다.
그날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성인이 된 후에는 분노로까지 변모했다. 같은 반 친구들 중 김밥 대신 간단한 도시락을 챙겨온 경우도, 혹은 아예 먹을 것을 싸 오지 못한 경우도 있었을 거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18세기 프랑스 귀족 출신 법관이자 미식가였던 브리야 사바랭이 남긴 이 말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경구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정말 그러한지. ‘오늘 뭘 먹을지’가 ‘통장 잔고가 얼마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신이 먹은 음식이 과연 당신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때때로 우리는 타인의 식탁을 엿보며 부러워하거나 칭송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비교대상이라야 반 친구가 전부였던 옛 시절과 달리, 지금은 온라인으로 매일 수천수만 명의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시대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특히 요즘 청년들의 식생활은 극과 극을 달린다. 인스타그램 피드 속 누군가는 값비싼 오마카세를 사 먹으며 사람들의 ‘좋아요’를 받고, 그 프레임 바깥의 누군가는 차갑게 식은 삼각김밥을 씹는다.
특별한 날에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욕망을 질책하려는 것은 아니다.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1식을 제공하라는 사회주의식 주장을 펼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지점은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음식의 가치에 대한 측면이다.
미국의 심리학 교수 리언 래퍼포드는 음식을 바라보는 관점을 쾌락주의, 영양주의, 영성주의 세 가지로 정리했다. 유럽 품종이라 국내에선 구하기 힘들다는 ‘납작 복숭아’의 맛이 궁금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면, 그건 쾌락주의에 가깝다. 복숭아의 비타민C 함유량이 궁금하다면 그건 영양주의다. 만약 당신이 ‘어린 시절 어머니가 손수 끓여주셨던 복숭아 병조림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면, 혹은 ‘이 열매 한 알을 키워낸 농부의 수고’에 감사하고 있다면, 당신은 영성주의적 관점을 지닌 사람이다.
우리는 단순히 맛의 즐거움만을 위해, 영양분 섭취만을 위해 음식을 먹지는 않는다. 어떤 음식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음식 담론은 여전히 쾌락주의나 영양주의 단계에 머물러있는 듯하다.
며칠 전, 미쉐린 가이드는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내년 2월에 ‘미쉐린 가이드 부산’을 발간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국내 미쉐린 가이드 선정 도시는 서울에 이어 부산이 두 번째다.
그 정도로 부산은 이제 세계의 주목을 받는 미식 도시다. 뜨거운 주방에서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온 요리사분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분들께는 진심으로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부산의 식당이 ‘별 세 개’를 받게 된다면 나도 언젠가 꼭 한번은 가볼 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려가 밀려온다. 별을 좇는 무리들의 환호성이 또 누군가의 평범한 식탁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지는 않을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가치를 함부로 재단해 버리는 하나의 거대한 잣대가 아니다. 잊지 말자. 당신이 오늘 하루 무얼 먹었든, 당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은 결코 변치 않는다는 것을. 당신의 평범하고도 눈부신 밥상에, 오늘도 기꺼이 ‘하트’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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