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성장률과 사라져가는 평균

기자 2023. 6. 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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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50·60대가 어린 시절, 1인당 국민소득과 수출목표는 교실 벽에 위압적인 구호로 걸려 있다가 시험에까지 출제되는 숫자였다. 그 숫자가 코흘리개들에게 구체적 의미로 다가왔을 리야 만무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사회 전체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 남아 성장률에 대한 집착으로 되살아나곤 한다. 그 옛날에는 북한을 앞지르는 것이 지상과제이자 자랑거리였다면, 어느 순간에는 중진국, 다시 선진국에 접어드는 것이 마치 국가대표 축구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처럼 기쁘게 받아들여지곤 했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1인당 소득이란 산술평균 개념이므로 현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음은 당연하지만, 그 실제 의미를 깨닫기란 생각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복잡한 논의보다는 인터넷에서 손쉽게 검색 가능한 데이터에 따라 한국 경제에 관해 간단한 어림 계산을 해보자.

2022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약 4200만원, 환율이 달러당 1300원이라고만 쳐도 3만2000달러가 넘는다. 요컨대 한국 사회에서 평균만 한다면 4인 가족의 가계소득이 1억6000만원에 이른다는 뜻이다. 한국 경제에서 재산의 소득에 대한 비율(경제학자 피케티가 이른바 ‘베타’라고 불렀던 비율)이 보수적으로 잡아도 7 정도라고 하면, 평균적인 4인 가구의 재산은 1억6000만원의 7배인 11억2000만원이 된다. 그런데 막상 상위 10%에 들기 위한 커트라인이 되는 순자산은 겨우(!) 9억원이 약간 넘는다(NH투자증권 보고서). 무슨 뜻일까? 국민소득으로 계산한 평균적 가구가 재산도 평균적으로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이미 전체에서 10% 상위권에 든다는 의미다.

사실 체감하는 평균에 더 가까운 것은 국민소득보다는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이다. 2021년 기준 도시근로자 가구(4인)의 월평균소득은 700만원 남짓, 연간으로 계산하면 8400만원가량이니, 1인당 국민소득으로 단순 계산한 값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2인 가구 기준으로 보면, 연간 5400만원 정도라 사정이 조금 나아지기는 한다. 단순 평균값과의 차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한국 가계의 평균 부채가 연간 소득의 약 95%라는 데이터와 주거용 부동산이 전체 자산의 4분의 3 정도 된다는 데이터를 결합해 도시근로자 4인 가구의 평균적인 모습을 그려보자. 예의 ‘베타 비율’로 계산한 재산 총액은 5억8000만원가량이고 그중에서 4분의 3인 4억3000만원 정도가 주거용 부동산에 쓰이며, 약 8000만원의 가계부채가 모두 주택 구입이나 전세를 얻기 위한 대출이라 가정해도 이를 합쳐 5억원 약간 넘는 부동산을 소유하거나 임차해 살고 있는 셈이다. 서울 시내 아파트의 평균 전세가격과도 대체로 비슷한 수준이니 비교적 현실감 있는 계산일 것이다.

이 지루하지만 나름 극적인 계산의 교훈은 무엇인가? 이른바 ‘평균 실종의 시대’에 실질 국내총생산(GDP)의 증가율로 정의되는 경제성장률은 이미 절대적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나 언론 등은 성장을 당연히 추구해야 할 디폴트 값으로 간주하며, 현실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이러한 태도는 끊임없이 증폭된다. 무엇을 하는가보다는 무엇을 했다고 간주되는가가 더 중요하며, 따라서 홍보가 관건이라 생각하는 이들 옆에는 온갖 낙관적 전망을 시쳇말로 ‘영끌’하여 예상치를 만들어주는 경제학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나라 전체의 경제성장률이 문제라면, 지역 단위의 선거에서는 해당 지역의 성장률에 관한 온갖 장밋빛 전망이 난무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른바 진보 정부도 양극화 해소나 분배 개선 못지않게 소득주도 “성장”을 포기하지 못했던 어정쩡한 입장을 취했던 것, 그 결과 스스로 성장의 입증 책임이라는 덫에 걸리고 말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그 입증책임과 더불어 “소득주도”마저 내팽개친 시대에 추상적 자유와 효율성의 외침만 공허히 허공을 맴돈다. 다시 돌고 돌아 ‘규제혁파’ ‘노동개혁’ ‘기업하기 좋은 나라’ 등의 단골 메뉴가 과연 성장을 가져다줄 것인지도 의문이거니와, 그렇게 해서 성장을 얻은들 평균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사실 누가 언제 무슨 옷을 입고, 언제 누구와 술을 마셨는가는 부차적인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골 깊게 갈라진 진영논리에 따라 누구는 비아냥거리고, 누구는 옹호하며 술자리 안줏감으로 소비하고 있기에 이미 우리의 미래는 충분히 어둡다. 어쩌면 기후위기나 출생률 저하 같은 선진적(?) 걱정은 오히려 한가한 것일지도 모른다. 암울한 전망 속에서도 누구 말마따나 벽에라도 대고 소리 질러야 한다는 심정으로 써보는 글이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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