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살피러 온 명나라 관리 감탄 “수군 위용이 훌륭하오”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 2023. 6. 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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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역(意譯) 난중일기-이순신 깊이 읽기 <9> 계사년(1593년) 5월 17일~27일

- 왜적선 순찰하고 온 탐망군들
- “그리 대단한 흉모는 없다” 보고

- 조선 수군 허실 보러 온 명나라
- 배에 올라타고선 칭찬 이어져

- 명나라 송경략이 하사한 화전
- 원균, 나누지 않고 혼자 쓰려해

5월17일[6월15일] 맑음. 새벽에 바람이 크게 불었다. 순천부사, 광양, 보성, 발포와 이응화가 보러 왔었고, 변존서는 병 때문에 돌아갔다. 영남수사(원균)가 군관을 시켜 진양(진주)의 긴급보고서를 전했다. 보니, 제독 이여송은 지금 충주에 있으면서 적을 친다고 하지만, 적도들은 오히려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과 약탈을 일삼고 있다고 하니 통분하고 또 통분하다. 종일 바람이 몰아치니 마음도 산란하다. 고성현령이 군관을 보내어 문안하고 겸해서 추로수(약술 이름)와 쇠고기 요리와 꿀통을 가져왔으나, 복중(숙모상)이라 받자니 미안하고 정으로 보낸 것을 의리상 돌려보낼 수도 없으므로 군관들에게 내주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배 안의 방으로 들어갔다.

경남 통영시 명정동 충렬사에 전시된 이충무공전서 등 기록물. 벽면에 펼친 그림을 통해 이순신 함대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5월18일[6월16일] 맑음. 이른 아침에 몸이 무척 불편하여 온백원(위장약) 4알을 먹었다. 우수사와 가리포가 와서 만나고 조금 있으니 시원하게 설사가 나오며 좀 편안해진 듯하다. 종 목년이 해포에서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곧 답장을 써서 돌려 보내며, 미역 다섯 동을 함께 보냈다. 접반사에게, 적의 형세에 치기 쉽고 어려운 점과 또 삼도수군에 한 사람의 주장(主將)을 세워야 한다는 점 등 세 건의 공문을 한 장의 서류로 만들어 보냈다. 전주부윤(권율)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금 순찰사의 직무까지 겸직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겸직한 순찰사의 도장은 찍히지 않았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대금산과 영등포 등지의 탐망군들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왜적선들이 출몰은 하지만 그리 대단한 흉모는 없다”고 했다. 새로 협선 2척을 만드는데 처음으로 못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5월19일[6월17일] 맑음. 아침밥을 윤봉사와 함께 먹는데 여러 장수들이 애써 권해서 억지로 고기를 먹게 되니 비감해 가슴이 메었다. 순찰사의 공문에 따르면, “명나라 장수(유원외)의 패문에 따라 왜적이 점령해 온 부산바다 어귀를 명나라 군대가 진작 나아가 끊어 막았어야 했다”고 했다. 공문을 즉시 받았다는 확인서와 공무에 관해 청원하는 글을 써서 보성 사람을 시켜서 보냈다. 순천부사가 쇠고기 등을 보내왔다. 방답과 이홍명을 만났고 기숙흠도 보았다. 영등포 탐망인이 와서 다른 변고는 없다고 보고했다.

5월20일[6월18일] 맑음. 날이 밝아 대금산의 탐망군이 와서 보고하는 것도 전날 영등포의 보고와 마찬가지였다. 순천이 다녀갔다. 소비포권관도 왔다 갔다. 정오경 탐망군이 와서 왜선이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하므로 본영 군관에게 “왜적의 물건들(공물, 貢物)을 실어 오도록 하라”는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흥양사람이 가지고 떠났다.

5월21일[6월19일]

새벽에 출항하여 거제 유자도(거제시 고현동의 작은 섬, 지금은 매립되었다)가 있는 한바다에 이르니, 대금산 탐망군이 와서 왜적의 출몰이 전과 다름없다고 했다. 저녁에 우수사와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이홍명이 다녀갔다. 오후 2시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농작물이 좀 소생할 것 같다. 이영남이 왔기에 만나 보니 영남수사 원균이 거짓 내용으로 통문을 돌려 군사들을 속이고 이간질함으로써 대군을 동요케 했다고 한다. 그 음흉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밤새도록 광풍이 몰아치고 비까지 내렸다. 새벽녘에 이르러 거제선창에 배를 대니 곧 22일이다.

5월22일[6월20일]

사람들이 바라던 차에 비가 아주 흡족하게 왔다. 늦은 아침에 나대용이 본영에서 기별을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은 명나라 시랑 송응창의 패문과 이를 가지고 오는 그의 파견원과 전라도의 도사와 선전관 한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송시랑의 파견원은 전선을 살펴보기 위해 온다고 했다. 곧 우후를 영접하도록 내보냈다. 오후에 칠천량으로 진을 옮겨온 뒤 접대할 절차를 문의하기 위해 나대용을 내어 보냈다. 저녁에 방답이 와서 명나라 관리를 접대하는 일에 관해 조언했다. 경상 우수사의 군관 김준계가 와서 그 대장(원균)의 의사를 전하고 갔다. 비가 종일 그치지 않았다. 흥양군관 이호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5월23일[6월21일]

흐리기만 하고 비는 오지 않더니 늦게는 비가 오락가락했다. 우수사가 오고 이홍명도 왔다. 영남우병사(최경회)의 군관이 와서 적의 소식을 전하고, 또 본도(전라도) 병사(선거이)의 편지와 문서가 왔는데, “창원에 있는 적을 치고 싶으나, 적의 형세가 거세기 때문에 경솔히 나아갈 수 없다”고 했다. 저녁에 급히 아들 회가 와서, 명나라 관원이 영문(여수 본영)에 이르렀고 바로 배를 타고 출발했기에 곧 이리로 들어올 것이라고 전했다. 어두워진 후에 영남수사(원균)도 명나라 관원을 접대하는 일로 와서 의논하였다.

5월24일[6월22일]

비가 오락가락했다. 손님을 맞기 위해 아침에 거제 앞 칠천량 바다 어귀로 진을 옮겼다. 나대용이 명나라 관원을 사량 바다 가운데서 발견하고 먼저 와서 전하되, “명나라 관원과 통역 표헌과 선전관 목광흠이 함께 온다”고 한다. 오후 두 시쯤 명나라 관원 양보가 진문에 도착했다. 영접책임을 진 우별도장 이설이 나가 맞아 배로 안내하여 오니 우선 우리 배의 위용을 보고 매우 기뻐하는 기색이다. 내가 탄 배로 청하여 오르게 하고, 황제의 은혜를 재삼 사례하며 마주 앉기를 청하니 굳이 사양하며 선 채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이야기하면서 수군의 위용이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다. 예단을 올리니,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하다가 마침내 받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두 번 세 번 감사하다고 사례했다. 표신(標信)을 상 위에 모신 후, 선전관과 조용히 의논하였다. 아들 회가 밤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5월25일[6월23일] 맑음. 명나라 관원과 선전관은 어제 취한 술이 쉽게 깨지 않는 모양이다. 아침에 통역 표헌을 청하여 명나라 장수가 무슨 말을 하던가 물으니, “명나라 장수의 의사가 어떤지는 잘 알 수가 없고, 다만 왜적을 쫓아 보내고 싶다고만 자꾸 얘기하더라”고 했다. 역관이 이어 말하기를 “송시랑이 수군의 허실을 알고자 하여 그가 거느린 군중(軍中)의 탐정 양보를 보낸 것인데, 우리 수군이 이렇게도 장하니 기쁘기 한이 없다“고 했다. 늦게 명나라 관원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노자로 쓸 비용도 체지로 써 주었다. 정오에 거제현 앞에 있는 유자도 앞 바다 가운데로 진을 옮기고서 우수사 (이억기)와 오랫동안 군사문제를 토의했다. 광양현감이 왔고 최천보와 이홍명은 와서 바둑을 두다 헤어졌다. 저녁에 조붕이 와서 이야기하다 갔다. 초저녁이 지나서 영남에서 오는 명나라 사람 두 명과 우감사영의 아전 한 사람과, 접반사 군관 한 사람이 진문에 이르렀는데 밤이 깊지 않아 맞아들였다.

5월26일[6월24일]

비가 많이 왔다. 아침에 어젯밤에 온 명나라 사람을 만나 보니, 절강성의 포수 왕경득인데 글자는 좀 알고 있으나 그들 말만 하므로, 한참이나 이야기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다. 순천이 개고기를 차려내 놓았는데 광양이 오고 우수사도 와 함께 이야기했다. 가리포는 청했으나 오지 않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밤새도록 퍼붓듯이 왔으며 밤 열 시쯤부터 바람마저 세게 불어 모든 배를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우수사의 배와 맞부딪치는 것을 겨우 구해 놓았더니, 또 발포만호(황정록)가 탄 배와 맞부딪쳐 거의 부서질 뻔하다가 겨우 면했고, 내 군관 송한련이 탄 협선은 발포 배에 부딪쳐 많이 상했다고 한다. 비바람이 지나간 뒤에 영남 우수사(원균)가 와서 봤다. 순변사 이빈이 공문을 보냈는데, 실제보다 지나친 말이 많이 씌었으니 우습다.

5월27일[6월25일]

비바람에 배들이 계속 부딪칠 것 같아 진을 유자도로 옮겼다. 협선 세 척이 간 곳 없더니 저녁나절에야 들어왔다. 순천과 광양이 와서 개고기를 차려냈다. 영남병사(최경회)의 답장이 오고, 전라병사(선거이)의 편지도 왔다. 영남병사의 답장에는 원수사(원균)가 송경략이 보낸 화전(火箭)을 제 혼자만 쓰려고 계획해 가만히 두고만 있다 한다. 비웃음거리다. 전라병사의 편지에는 “창원의 적들을 오늘 토멸하러 가다가 비가 오고 개이지 않아 실행하지를 못했다”고 했다.

㈔부산여해재단·국제신문 공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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