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학창시절, 전교조 해직도 버티게 해준 어머니

한겨레 2023. 6. 4. 18: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기억합니다] 어머니 조옥희님 1주기 기리며
1991년 서울 강서구 글쓴이 집에서 작은 손자가 태어난 직후 서울에 와서 손자들을 돌보는 어머니 모습. 하성환 제공

나는 큰아들이어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다. 기대 또한 컸다. 어린 시절 부모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다. 초등학교 시절, 월례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었고 상장을 보여드리면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셨다.

중·고등학생 시절은 1970년대 박정희 유신 정권 시절이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머릴 빡빡 밀어야 했다. 60명이 넘는 콩나물 교실과, 초등학교와 달리 억압적 분위기에서 생활하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어두운 기억으로 남은 중·고등학교는 그냥 수용소 같았다. 솔직히 어두운 기억밖에 없다. 갑갑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어머니께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머니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저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셨을 뿐, 딱히 말씀이 없으셨다.

1993년 부산 영도구 동삼동 태종대 자유 놀이공원에서 어머니가 두 손자와 함께 한 모습. 하성환 제공

고교생 시절엔 아침마다 복장 검사에 걸려 운동장을 돌거나 오리걸음 할 때가 적지 않았다. 학생부 교무실 옆을 지나치다 보면 몽둥이로 때리는 소리와 ‘억’하는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그 시절 학교는 어둠 그 자체였다. 아침마다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산꼭대기에 있는 교문을 향해 헉헉거리며 올랐다. 바짝 긴장한 채 교문을 통과하던 그 순간은 긴장되고 힘들었다. 장교 출신 교련 교사들과 체육 교사들이 험악한 인상을 쓰고 범죄자 검문하듯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날 재수 없이 “너 이리 나와!” 하며 손가락 총이라도 맞는 날이면 하루를 침울하게 시작했다. 여름방학 강제 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은 날은 그 이튿날 어김없이 기다란 마대 걸레 자루로 풀 스윙을 당했다. 그 어두운 시절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격려해준 분이 어머니였다.

어느 날은 머리가 3㎝로 길다며 학생부로 끌려갔다. 그 교사는 가로세로 고속도로를 내며 빈정대는 투로 근엄하게 꾸짖었다. “공부만 잘한다고 훌륭한 학생은 아니야! 교칙을 잘 지켜야지! 그게 학생다운 품성을 간직한 모습이잖아!” 하면서 내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일명 바리캉으로 머리를 짧게 깎인 날, 아무 생각 없이 버스를 탔다가 버스 뒤쪽 여학생들이 킥킥대며 웃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고1 땐 매주 초 고사 시험을 쳤다. 그리고 교무실로 불려가 맞았다. 그러다 보니 월요병이 절로 생겼다.

무엇보다 각반 차고 목총 메고 분열과 사열을 할 때 오와 열을 맞추지 못했다. 그러면 어디선가 느닷없이 달려와 싸대기를 후려치던 교사들이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70년대 유신 시절이나 일제강점기 시절이나 학교 교육은 파시즘 교육 그 자체였다. 고등학교 때도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는 걱정 어린 눈길로 힘들어하셨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웃음기 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91년 부산 영도구 동삼동 부모님 댁에서 어머니가 큰손자를 안고 작은 손자를 업고 있는 모습. 하성환 제공

무엇보다 내 기억에 가장 깊숙이 남아 있는 어머니 사랑은 89년 전교조로 해직당했을 때다.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이 교사노동조합인 전교조를 마음으로 지지하고 아들을 응원하셨다. 91년 서울 생활을 접고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부산 부모님 댁으로 내려왔을 때도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손자 둘을 안고 업고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잘 키워주셨다. 허리가 매우 아프셨을 텐데도 어린 손자가 자다가 악몽을 꾸어 깨어나 울면 안방에서 선잠을 주무시던 어머니는 어떻게 아셨는지 바로 달려 나오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품 안에 안고 다시 잠들 때까지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셨다.

국가폭력이 일상적으로 자행되던 70, 80년대 그 어두운 시절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따뜻한 사랑과 걱정 가득한 눈길을 받으며 어두운 시절을 견뎌냈던 것 같다. 이제 어머니가 하늘로 돌아가신 지 1주기가 돌아온다. 부산엘 내려가면 언제나 환한 얼굴로 맞아주셨던 어머니가 오늘따라 더욱 그립고 그립다. 선잠을 주무시며 한없는 사랑과 걱정 속에 한평생을 보내셨던 어머니가 하늘에서나마 평화와 안식을 누리길 마음으로 빌고 추모한다.

하성환 전 교사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