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태권 쌍둥이…3개국이 키운 발차기

박강수 2023. 6. 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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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마르통 자매, 신성 박태준
세계태권도선수권 사로잡은 천재들
헝가리 태권도 대표팀의 루아나 마르통(왼쪽)과 비비아나 마르통. 세계태권도연맹 제공

비비아나 마르통(17·헝가리)은 숨 돌릴 새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강호 페루자 사디코바(21)는 2라운드 시작 41초 만에 오른 허벅지를 맞고 다운됐고, 1분3초께 다시 같은 부위를 맞아 쓰러졌다. 두 번 모두 의료진이 투입됐다. 사디코바는 절뚝이며 일어섰지만 비비아나는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이미 1라운드를 내줬고 2라운드도 4-8로 뒤진 상황이었다. 결국 종료 6초를 남기고 10-23 점수차 패(12점 차가 되면 자동 패배)를 당했으나, 비비아나는 이번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가장 치열한 승부를 연출했다.

대회가 열리고 있는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크리스털홀 웜업 존에서 마주친 비비아나는 “좋은 경기였다”라는 취재진의 말에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메달 사냥은 불발됐지만 저력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한 한 판이었다. 앞서 지난달 29일에는 비비아나의 쌍둥이 언니인 루아나(17)가 여자 57㎏급 챔피언에 올랐다. 이번 대회 최연소 챔피언이자 헝가리 역사상 여자 태권도 선수로는 첫 세계선수권 금메달이다. 헝가리는 지난해 과달라하라 대회에서 오마르 살림(21)이 남자 54㎏급에서 우승하며 처음 금메달을 수확했고, 올해 여자부에서도 금 맛을 봤다.

루아나 마르통이 지난달 29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여자 57㎏급 결승에서 우승한 뒤 포효하고 있다. 세계태권도연맹 제공

헝가리 태권도의 성취는 다국적 연합의 산물이다. 지난 1일 한국 취재진과 만난 마르통 자매는 “태권도가 재미없었던 적이 없다”라며 밝게 웃었다. 헝가리인 부모를 둔 두 자매는 스페인에서 나고 자랐다. 7살 때 처음 태권도와 만났고, 일찍 두각을 드러냈다. 수비 미코넨 코치는 “이 친구들이 9살 때 부모가 저에게 ‘언젠가 우리 딸들을 맡기겠다’라고 얘기했다. ‘그러시던가요’라고 답하고 말았는데 어느 날 정말 마드리드로 이사를 오셨다. 그때 마르통 자매에게 ‘너희들을 챔피언으로 만들겠다’라고 말해줬다”라고 회상했다. 스페인판 ‘맹모삼천지교’인 셈이다.

미코넨 코치는 런던올림픽과 리우올림픽을 연달아 출전했던 핀란드 출신 사범이고, 그가 속한 도장의 이름은 ‘한국 인터내셔널 스쿨'이다. 1977년 한국인 태권도 사범이 세운 곳으로 현재는 스페인의 라말 헤수스 관장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정리하면, 마르통 자매는 ‘핀란드’ 코치가 ‘한국’이라는 이름의 ‘스페인’ 도장에서 키워낸 ‘헝가리’ 선수들이다. 루아나의 경우 이번 대회 6일 차(3일)까지 배출된 남녀 금메달리스트 14명 중 가장 어리다. 세계 각국에서 안정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재능들이 태권도 상향 평준화를 이끌고 있다.

박태준이 지난 2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남자 54㎏급 결승에서 이긴 뒤 기뻐하고 있다. 세계태권도연맹 제공

신풍은 곳곳에서 일렁인다. 도쿄올림픽에서 타이에 첫 태권도 금메달을 안겼던 파니팍 웡파타나낏(26)이 이번 대회 은메달(여자 49㎏)을 따냈고 이틀 뒤에는 캄몬차녹 시켄(17)이 시상대 같은 자리(여자 46㎏ 은)에 섰다. 선배의 경기 스타일을 빼다박은 그는 20년 넘게 타이 대표팀을 지도 중인 최영석(찻차이 최) 감독의 또 다른 작품이다. 남자 80㎏급 은메달을 차지한 미국의 칼 니콜라스(22)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니콜라스는 정교한 득점용 타격이 아닌 화려한 기술 중심의 태권도로 대전 상대들을 격파하며 ‘올드 팬’들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한국에서는 18살 신성 박태준(경희대)이 지난 2일 남자 54㎏급 금메달을 따냈다. 불과 1년여 전만 해도 랭킹 점수 자체가 없었던 박태준은 지난해 10월 맨체스터 그랑프리 깜짝 우승에 이어 첫 세계선수권까지 제패했다. 역시 모험적인 플레이를 즐기는 그는 준결승전에서 기습적인 뒤돌려차기로 상대 머리를 강타해 5점(최고점)을 따내기도 했다. 그는 경기 뒤 “공격적인 플레이를 좋아한다. 체력이 되는 데까지는 공격적으로, 재밌는 발차기도 하면서 즐기는 경기를 하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했다.

태권도에 빠져 한국 대표팀 경기를 보러 온 아제르바이잔의 잘레 라힘자데씨. 바쿠/박강수 기자

치열한 경기력은 현지 팬심도 사로잡았다. 이날 태극기가 새겨진 티셔츠를 들고 박태준의 경기를 보러 왔던 아제르바이잔의 대학생 잘레 라힘자데(19)씨는 “태권도는 ‘젠틀’한 스포츠라 좋아한다. 이번 대회를 보고 많은 자극을 받았다. 저도 다음달부터 태권도를 배울 것”이라고 했다.

바쿠/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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