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의 어떤 날] 59년 만에 아버지를 현충원에 모셨다

한겨레 2023. 6. 4. 18:17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어린 날 집에 손님이 오시면 아버지는 늘 희경과 나를 불러 세워 노래를 시키셨다.

"내 나이 열세 살, 아버지는 다시는 못 오실 먼 길 떠났죠. 딸 셋만 세상에 덩그러니 두 눈 못 감고 떠나셨어요./ 내 나이 마흔 살 고개 넘어 아버지보다 더 살고 나서야 그 나이 남자들 어리더라. 늦바람 당신을 용서했어요./ 세월이 흘러 나도 떠나면 거기서 우리 만나게 될까? 아버진 채 마흔도 되기 전에 살지도 못하고 가신 거예요./ 험한 세상에 어떤 남자가 당신만큼 날 사랑해줄까? 아버진 그렇게 가시려고 남다른 사랑을 주신 거예요./ 내 나이 예순 살 넘어서야 용케도 살아온 길 뒤돌아보니 기댈 곳 없는 이 거친 세상 당신은 가고 난 남아있네요."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양희은의 어떤 날]

50년대 중반쯤, 제대 전 아버지 모습. 양희은 제공

양희은ㅣ가수

어린 날 집에 손님이 오시면 아버지는 늘 희경과 나를 불러 세워 노래를 시키셨다. 그래서 진즉에 우리 둘은 취학 전 어린이 때 손님맞이를 위한 레퍼토리를 어느 정도 확보해놓고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신 아버지 친지 분들은 같은 처지인지라 명절이면 모여 엄마의 솜씨로 차린 만두, 녹두부침, 갈비찜, 김치말이 국수 등 푸짐한 음식으로 그리움을 달래셨다. 당신 어머니의 그리운 손맛과 비견해 정성껏 차려낸 서울태생 울 엄마의 솜씨를 타박도 하셨다.

어쩌면 이른 죽음을 예견한 듯 먼 친척분의 상가에서 다음은 내 차례라고도 하셨단다. 우리 나이로 서른아홉에 가셨으니 살아보지도 못하고 떠나신 셈이다.

“내 나이 열세 살, 아버지는 다시는 못 오실 먼 길 떠났죠. 딸 셋만 세상에 덩그러니 두 눈 못 감고 떠나셨어요./ 내 나이 마흔 살 고개 넘어 아버지보다 더 살고 나서야 그 나이 남자들 어리더라. 늦바람 당신을 용서했어요./ 세월이 흘러 나도 떠나면 거기서 우리 만나게 될까? 아버진 채 마흔도 되기 전에 살지도 못하고 가신 거예요./ 험한 세상에 어떤 남자가 당신만큼 날 사랑해줄까? 아버진 그렇게 가시려고 남다른 사랑을 주신 거예요./ 내 나이 예순 살 넘어서야 용케도 살아온 길 뒤돌아보니 기댈 곳 없는 이 거친 세상 당신은 가고 난 남아있네요.”

내가 쓴 ‘아버지’의 노랫말이다. 남겨진 우리 셋, 장녀인 내가 13살, 희경이 11살, 희정이 7살이었다. 참 말로 다 할 수 없겠다!! 인생 굽이굽이 어쩜 그리도 울타리 없는 휑뎅그렁한 살림살이가 나아지지도 않고 기댈 곳도 없었는지?

5월 마지막 주말 제법 여유롭게 쉴 준비로 길은 북적였지만 우리는 가신 지 59년 만에 아버지를 현충원에 모셨다. 부평 당신 소유의 야산 꼭대기에서 이장해 희경과 내가 사는 일산 가까이에 터를 마련하고 모셨는데 이장하던 일꾼 아저씨들이 기골이 장대하시고 육척장신이시라고 했다. 하기야 우리 어릴 때 아버지 팔뚝에 매달려 철봉하듯 놀았던 기억이 난다. 모든 서류일 처리는 막내가 맡아 했고 시댁 어른을 현충원에 모시는 선례를 보고 울 아버지도 충분한 자격 아닐까 싶어 더듬더듬 육사, 육군본부, 보훈청, 광탄면사무소 등에 알아보며 서류 보내고 민원 접수하고 또 확인하며 답을 기다린 끝에 다섯 달 만에 육사 4기 졸업증명서와 국가유공자증서가 배달되었다. 막내는 옛날 갖고 놀았던 4개의 훈장을 기억하고, 아버지의 자리도 현충원이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기다렸단다. 다시 한 번 용미리 근처 산소의 개장 허락을 받아 이장하고 화장하고 현충원에 모시면서 돌아가신 후에도 여러 번 이사를 다니시네…했다.

아버지와 함께 떠오르는 여러 개의 스틸 컷이 있지만 이혼이란 말도 생소했던 시절, 최첨단으로 이혼한 가정에다가 새 여자 들이고 3년도 못 살고 가신지라 “쟤랑 놀지 말랬지?” 수군대는 손가락질 속에서 우리 딸 셋은 자랐다. 멍든 가슴 빼고는 징징대지 않고 크게 상하지 않은 채 셋이서 연극을 하며 우리의 암담함을 웃음으로 달래며 지냈다.

#희경: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우리 두 자매는 절대 공인이 못됐을 거란 생각도 든다. 아마도 딸 셋을 금이야 옥이야 금지옥엽 키웠을 테니. 별로 인간성 좋은 어른은 못 됐을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읜 걸 위로해본다. 가수 양희은, 배우 양희경, 박사 양희정―험난한 가정사를 발판 삼아 우뚝 서 있는 지금의 모습을 낳아주신 당신께 자랑스럽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희정: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친절하고 예의 바른 분이다. 지금도 택시 잡을 때 계속 양보하시던 모습이 기억된다. 어린 나하고 한 약속도 꼭 지키셨고,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어떻게 했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 여름에는 낚시, 가을 겨울엔 사냥을 다니셨는데 공부 때문에 언니들은 못 갔고 나이 어린 나는 아버지와 자주 놀러 다녔다. 나와 사냥개를 옆에 태우시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시며 길을 떠나시곤 했다. 돌아가실 무렵 집에서 쉬시는 동안에도 내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주셨다. 나도 아이에게 그리하려 하지만 하기 어려울 때가 더 많다. 돌아가신 지 59년 우리 아이의 체격, 얼굴, 목소리에서 아버지를 늘 뵌다.(막내네 집 아들은 외할아버지를 너무 닮았다.)

#희은: 우리 딸 셋의 기억을 종합해 조각보 이불을 지으면 비교적 많은 부모님의 이야기가 이어질 테지만,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우리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라고 밖엔 말할 길이 없다. 결손가정의 아이들로서 밝았고 많이 웃었으며 서로를 보듬어주며 잘 자란 셈이다. 장하고 기특한 어린아이들이었다. 어린 날 그렇게 걸핏하면 노래를 부르게 하신 것도 어쩌면 당신이 떠난 후에 어린 가장의 앞길을 미리 터주고 준비시키신 걸까?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