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하루치 용기 한줌

한겨레 2023. 6. 4.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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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년 전, 피디가 되겠다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고향의 방송국에 들어갔다.

일손이 부족한 지역 방송국에서 피디는 보통 입사한 해에 연출을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피디들은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는데, 그런 전설 같은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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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말고] 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오년 전, 피디가 되겠다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서른살 무직자가 되어 방송국 공채 시험을 보러 다녔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고향의 방송국에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새로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보다 이 일은 나와 찰떡같이 맞을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이 더 컸다. 멀리 돌아온 만큼 더 잘하고 싶었다.

기대는 곧 무너졌다. 일손이 부족한 지역 방송국에서 피디는 보통 입사한 해에 연출을 시작한다. 수년간의 조연출 생활을 거쳐야 연출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서울 방송국들과는 사뭇 다르다. 입사한 지 넉달 만에 주간 정보 프로그램의 십여분짜리 꼭지 하나를 맡았다. 2년차엔 직접 기획한 프로그램을, 3년차에 다큐멘터리를, 4년차에 시사 프로그램을 연출했다. 매번 경험도 길잡이도 없이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피디들은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는데, 그런 전설 같은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신입 시절엔 촬영 현장에서 늘 도망치고 싶었다. 우유부단하고 잘 머뭇거리는 내가 현장에서 하는 일은 팔 할이 결정이었다. 선택이 더딘 자를 위한 지옥이 있다면 여기인가 싶었다. 경우의 수를 따질 시간도, 과감한 결단을 내릴 자신감도, 새로운 문제에 대처하는 순발력도 부족했다. 무엇을 찍고 찍지 않을지, 어떤 순서로 어떻게 일을 처리할지 동료들이 물을 때마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음, 글쎄요.’ 뜸 들이며 고민하다 보면 그들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 조급해져서 무작정 결정을 내리고, 편집실에서 그 선택을 후회하고, 퀭해진 모습으로 다시 촬영장에 가는 일을 반복했다.

완벽한 계획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나을 것 같았다. 필요한 장면을 헤아리고, 효율적인 촬영 순서를 짜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도 어김없이 사무실에 앉아 촬영 계획을 쓰고 있는데, 한 선배가 뒤로 쓱 지나가며 대뜸 말했다. “인마, 백날 해봐라. 현장이 네 맘대로 되나.”

이십년 넘게 피디로 산 선배의 말은 정확했다. 계획과 맞아 떨어지는 현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언제나 일어났고, 촬영을 위한 충분한 시간과 완벽한 환경은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은 연출이 꼭 사는 일과 닮아 보였다. 계획대로 풀리지 않고 끊임없이 선택의 순간들이 밀려온다는 점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결정의 책임은 온전히 내 몫이어서 가끔은 무섭게 외롭고 막막하다는 것도 비슷했다.

5년차가 된 지금도 촬영 전날엔 선잠을 잔다. 다음날 촬영이 하기 싫어서 별생각을 다 한다. 아무래도 이 일은 나와 안 맞는 것 같은데. 못하는 일을 잘해보겠다고 용을 쓰는 건 사실 좀 미련한 일 아닌가. 좀 더 수월하게 잘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없을까. 그러다 꿈에서도 촬영을 하러 간다. 꿈속의 나도 실제와 다르지 않아서, 스스로에 대한 불안과 의심을 안고서 아무튼 일하고 있다.

연출이 너무 어렵다고 고백하면 선배들은 시간이 다 해결해준다고 말했다. 우직하게 이 길을 걷다 보면 정말로 모든 게 쉬워지는 날이 과연 올까. 잘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연출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품은 또 어찌나 많이 드는지 말도 못한다. 잘하지 못할 일, 괜히 애쓰지 말고 그만할까 싶다가도 늘 주저하게 된다. 아직 다 쓰지 못한 마음이 한참 남은 것 같다. 별수 있나, 그저 오늘 할 일을 한다. 최고의 연출은 모르겠고 그냥 최선을 다하는 직업인은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하면서.

오늘의 현장은 반드시 어제의 계획을 빗나가고, 오늘의 실수를 내일이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알면서도 꿋꿋하게 일을 하러 간다. 불안과 두려움을 뒤로 한 채, 오늘 하루치 용기 한 줌만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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