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인문학이 필요한 시간] 자유 그걸 찾아 인간은 투쟁했고 달콤함 속에 독이 있었으니 늘 긴장하며 경계해야 했다

허연 기자(praha@mk.co.kr) 2023. 6. 4.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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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자유는 무엇일까

◆ 매경 포커스 ◆

게티이미지뱅크

사람은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실 인간은 늘 자유를 꿈꾸었지만, 영원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영원히 손에 잡지 못하는 것. 그것이 '자유'였다.

그리고 '자유'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 그 독은 슬프게도 자유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거나, 타자의 자유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일까. 어느 측면에서 보든 사실 인간의 역사는 자유를 정의하고 자유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 투쟁하고, 자유가 독이 되지 않도록 감시해온 역사였다.

인류는 발생 이후 지금까지 기나긴 시간 동안 자유를 정의하고, 자유가 보장받을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만들고, 그 자유가 독이 되어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길고 지난한 과정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다. 그의 '자유론(On Liberty)'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와 공리주의에 관한 큰 틀을 제공해주었다.

밀은 끊임없이 획일성의 위험을 경계한 철학자였다. 그의 저서 '자유론'은 인류가 이론으로 정립하고자 애쓴 이른바 '자유'라는 폭넓고 모호한 개념을 명쾌하게 정의해준 고전이다. 그는 우선 개인의 자유의지와 집단 간의 불편한 관계를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으로 정의했다.

그가 최초로 정리해낸 자유의 개념은 지금도 시금석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런 것들이다.

△개인의식의 내면적 영역인 사상의 자유가 중요하다 △언론·연구·토론의 자유가 민주주의를 이끈다 △판단의 자유는 강요하는 것이 아닌 납득하는 권리다 △진정한 관용은 관점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로 표현할 수 없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벌이다.

다음 상황을 생각해보자. 학생 50명이 공부하고 있는 어느 고등학교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고 치자. 모두 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평소 행실도 나빴고, 친구들을 수시로 괴롭혔던 모두가 싫어하는 문제 학생이었다. 그는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도둑이라는 누명을 쓴 채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간이 흘러 그 학생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는 유력한 증거가 뒤늦게 나타난다. 하지만 교실은 침묵한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불편해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누명을 쓴 학생의 보복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

진실을 인정하면 50명의 학생 중 49명이 불행해지고, 인정하지 않으면 범인으로 지목된 1명이 계속 불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49명이 불행해지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니면 1명이 계속 불행해지는 것이 나은 것일까.

존 스튜어트 밀과 그의 저서 '자유론'

'절대다수의 절대행복'을 추구하는 이른바 공리주의(utilitarianism)는 여기서 49명의 행복을 택한다. 이것이 바로 공리주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다. 공리주의는 모든 구성원의 행복을 합산하는 일종의 집단이기적 한계를 지닌다.

같은 공리주의 철학자이면서도 밀은 1명의 행복도 부정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다.

"만일 여기에 일반적으로 공인된 의견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 또는 법이나 여론에 의해 허용되는 것에 반대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그런 이유에서 그들에게 감사하고, 허심탄회하게 그들에게 귀 기울이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가 우리 신념의 확실성이나 활기를 조금이라도 존중하는 한, 만일 반대자가 없었다면 우리 스스로 몇 배나 노력해서 이룩해야 하는 일을, 우리를 대신해 이룩해줄 사람이 있음을 기뻐하도록 하자."

밀의 '자유론'은 이런 점 때문에 상당히 의미 있는 저술이다. 공리주의를 한 단계 성장시킨 그의 이론은 20세기를 풍미한 공동체주의의 밑그림이 됐다. 존 롤스와 마이클 샌델로 이어지는 '정의론'의 스타들도 밀의 상속자들임이 분명하다.

'자유론'은 1859년에 출간되자마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막연한 찬양의 대상이었던 '자유'를 철학적 원리로서 본격적으로 분석한 거의 최초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고, 단 한 사람만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던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다른 모든 이들을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밀은 또 다른 공리주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개성'이라는 근대적 가치를 존중했다. "개성을 파멸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전제(專制)적인 것이다. 그것이 신의 의지나 대중의 공인된 명령이라고 해도 모두 전제적이다."

밀은 교육에 대해서도 탁견을 내보인다. '시험'에 대해서 기술한 다음 부분을 보자.

"일반적 국민이 보편적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더 나아가서 기억하는 것을 의무화하여야 한다. 의무로 부과될 수 있는 최소한의 과목에 대한 자발적인 시험을 치러야 하고, 시험에서 일정 수준에 이른 모든 사람에게 증명서를 발급해야 한다."

흥미로운 대목이다. 밀은 요즘처럼 등수를 매기기 위한 시험은 거론하지 않았다. 단지 한 사회 구성원이 기본적으로 체득해야 할 지식의 최소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도달했는지 측정하는 시험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밀은 개인의 자유를 역설하면서도 그 한계 역시 분명히 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개인의 자유는 그의 행위가 자신을 제외한 어떤 사람의 이익과도 관계되지 않는 한 사회적으로 제재를 받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가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면 개인은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럴 경우 필요하다면 사회적 법률적 처벌을 가할 수 있다는 논리다. '자유론'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권위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둘 사이의 절묘한 역학관계를 찾아낸 뜻깊은 저작이다. 개인과 사회라는 두 개의 공리를 모두 만족시키고 있는 '자유론'이 19세기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근대국가들의 헌법정신으로 활용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밀은 성장 과정도 특별했다. 그는 정규학교를 다니지 않고, 경제학자인 아버지 제임스 밀에게 세 살 때부터 개인교습을 받았다. 밀은 이미 열네 살 때 라틴어를 비롯해 그리스어, 문학, 논리학, 역사, 수학, 경제학의 중요한 고전들을 체계적으로 터득했다. 아버지로부터 독특한 천재 교육을 받은 셈이다.

이 교육 방식은 최근에도 회자되고 있는 천재 교육법이기도 하다. 이 방식의 핵심은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밀이 스스로 생각해 어느 정도 이해하기까지 기다린 다음 보충을 해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밀의 아버지는 아침 식사 전에 항상 함께 산책을 하면서 밀이 전날 읽은 책의 내용을 암기하도록 했다. 밀이 암기하는 걸 들으며 아버지는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주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공부를 마무리 지었다.

공부를 마친 밀이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게 됐을 때 아버지는 밀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제 새로운 사람들과 사귀게 되면 너는 네 또래보다 많은 것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많은 이들이 네 지식을 칭찬할 것이고. 그러나 네가 남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것이 네 자신의 공로 때문은 아니다. 너를 가르칠 수 있었고 거기에 필요한 수고와 시간을 아끼지 않았던 아버지를 둔 네 행운 덕분인 것이지. 그와 같은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보다 네가 좀 더 알고 있다고 해서 칭찬받을 일은 못 되며 반대로 칭찬을 받은들 네게는 더없는 치욕이 될 것이다."

개인교습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생시몽의 사회주의와 콩트의 실증주의를 접하는 등 견문을 쌓은 그는 아버지의 조수로 동인도회사에서 근무했으며 그 후엔 음악, 시, 미술 등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또한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한 벤담의 공리주의에 공감해 '판례의 합리적 근거'의 저술에 참여하기도 했다.

밀은 이 같은 성장 과정을 통해 경험과 학습, 인격과 감성으로 무장된 완벽한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밀은 당대 최고 종합지성이었다. 밀은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점점 복잡해져 가는 근대사회에 새로운 논리를 제공한 선구자였던 것이다.

물론 밀이 말한 자유를 '엘리트들의 자유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리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자유론'이 무려 160년 전에 쓰인 책이라는 시대적 상황 등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오류들이다.

그는 분명 선구자였다.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만이 주권자"라는 그의 결론은 '영원한 상식'으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모태가 됐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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