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릴없이 떠난 이나영이 피로감에 허우적대는 당신에게('박하경 여행기')

정덕현 칼럼니스트 2023. 6. 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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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경 여행기’, 과잉 콘텐츠 시대 미드폼 드라마의 도발
욕심의 짐을 덜어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박하경 여행기’)

[엔터미디어=정덕현] "19세기말 프랑스에서는 갑자기 떠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는 고3 국어교사 박하경(이나영)이 전하는 이른바 '미치광이 여행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문을 연다. 갑자기 은둔하듯 직장도 가정도 버리고 일상을 떠나는 이런 일들이 유행병처럼 당시 번졌는데, 박하경은 그들이 과연 미쳐서 여행을 떠난 것인가 하는데 의문을 던진다. 대신 "그대로 살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떠난 게 아닐까"하고 질문한다.

이 오프닝은 <박하경 여행기>의 주인공 박하경이 쉬는 날을 이용해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드라마가 보여줄 방향성을 지정한다. 콘텐츠 과잉의 시대. 양적으로도 쏟아져 나오지만, 질적으로도 자극 과잉인 콘텐츠들 속에서 <박하경 여행기>라는 콘텐츠는 잠시 떠나기로 한다. 자극이 주는 피로감을 벗어나 그저 박하경이 하릴없이 떠나는 여행을 찬찬히 따라가 보기로 하는 것.

이처럼 <박하경 여행기>에 대한 기대감은 단 몇 초 만에 목이 날아가는 자극적인 장면들로 시작해 더 큰 자극으로 이어지는 콘텐츠들(특히 OTT 콘텐츠들)과는 정반대에서 생긴다. 자극에 지쳐 심지어 '미쳐버릴 것 같은' 이들에게 이 작은 여행기를 통한 쉼과 여유를 제공할 거라는 기대감이 그것이다. 이를 실제로 보여주듯 박하경이라는 인물은 버스에서 졸다 해남의 어느 낮선 곳에 잘못 내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마음 내다버리기'라는 부제를 단 1회에서 박하경은 템플스테이를 가는 것인데 힘겹게 산을 오르며 눈에 띠는 돌무덤을 보면서 속으로 '발로 차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돌 하나를 쌓아 올리며 저마다 소원을 빌었을 그 돌무덤을 보며 왜 박하경은 발로 차버리고 싶은 욕망이 드는 걸까.

그건 박하경이 하는 이 여행이 마치 무언가를 깨닫거나 얻기 위해서 하는 그런 여행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템플스테이를 하기 위해 해남까지 왔지만 남들처럼 하룻밤을 지내지 않고 당일치기로 올라가려 한다. 가방도 그래서 백패 하나로 단출하다. 템플스테이에 도착한 그에게 안내를 위해 내려온 진영 보살은 그 가방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가방을 단출하게 잘 싼 거 보니께는 여행 고순갑네, 어? 아, 나는 여기 절에 처음 올 때요, 45리터짜리 있잖아요, 배낭. 뒤에서 보면 나 안 보이는 그런 큰 거에다가 온갖 거를 다 챙겨 왔어요. 하나를 안 써, 하나를, 그니까 사람이 짐을 쌀 때는 내가 욕심은 내지 근데 그 짐을 내가, 내가 메야 된다..."

돌무덤을 발로 차버리고 싶은 박하경의 욕망은 그 하나하나에 담겨 있을 저마다의 소망이 버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대신 그는 자신에게 가득 채워져 있는 어떤 것들을 하나하나 버리고 비워내고 싶어 한다. 심지어 '무'를 실천하는 산사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소망을 빈다. 그것이 박하경에게는 비워내기보다는 욕망 하나를 더 얹는 일들이다.

박하경이 절에서 만난 소설가는 은근히 읍내에 나가 술 한 잔 하며 놀자고 제안한다. 스님이 내준 차 맛을 보며 그는 그 차가 구하기 힘든 것 아닌 좋은 차냐 아니냐를 묻는다. 하지만 스님은 차를 마시면서도 방귀 뀌는 걸 자연스럽게 여길 정도로 그런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듯 인터넷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차라고 말한다.

저마다 마음을 비우겠다며 명상을 하느라 애쓰지만 좀체 그게 잘 되지 않는 박하경은 절을 빠져나와 아무 길이나 걷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인류가 생긴 이래 떠돌이야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겠지. 문제는 항상 다른 어떤 곳을 원하고 다른 어떤 곳에 가서도 또 다른 어떤 곳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계속 헤맬 수밖에 없다." 즉 템플스테이에 오거나 절을 찾아와서도 마음을 비우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무언가를 얻으려 한다는 것이다.

우연히 마주한 돌무덤을 보며 또 '발로 차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던 박하경은 길이 아닌 풀 사이를 헤집고 나오는 묵언수행을 하는 이를 만난다. 말을 하지 않는 그를 무작정 따라나선 박하경은 그 침묵 속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묵언수행자가 따준 나무 열매를 맛보고, 소원을 비는 마음 따위는 없어 보이는 묘기에 가까운 돌 세우기 시범을 본다. 또 나무에 기대 눈을 감고 새소리를 듣기도 하고 솔방울 냄새를 맡기도 하며 너른 바위에 앉아 쉬다가 결국 석양이 물들어가는 바다를 마주하게 된다. 묵언수행자는 그 석양 앞에서 비로소 한숨을 내쉬고 이렇게 말한다. "이제 좀 살겠네." 묵언수행이라는 형식조차 훌훌 털어버리는 진정 비워낸 자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박하경 여행기>는 첫 회의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욕심의 짐을 덜어내고 나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담아내는 드라마다. 미드폼으로 30분도 안 되는 분량이고 게다가 대단한 사건들이 벌어지지 않지만, 그래서인지 박하경이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이 하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담겨진 의미나 가치들이 새삼스럽게 읽힌다. OTT가 열어놓은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남들 다 보는 걸 안보면 못 배기겠는 마음 때문에 그 피로감에도 허우적댔다면, 잠시 그 짐 같은 강박을 내려두고 이 여행자를 따라가 보는 건 어떨까. 그 편안함 속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어떤 것들을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게다. 물론 그저 편안함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테지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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