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개벽’ 단어로도 설명이 힘들다…빌딩숲 가득한 이곳이 사실은 황무지?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입력 2023. 6. 4. 10:06 수정 2023. 6. 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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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 위주의 아카이빙을 시작합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 같은 장소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지난 3월 서울 여의도 윤중로를 따라 벚꽃이 만개해 있다. [한주형기자]
여의도 윤중로 벚꽃길을 따라 걸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여의도를 한 바퀴 감싸는, 봄이면 하얀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이 길이 사실 ‘길’이기 이전에 ‘제방’이었던 사실을 아시나요. 한때 모래바람 날리던 섬이 빽빽한 마천루들로 덮이기까지, 이번 사-연에서는 여의도의 ‘천지개벽’ 발자취를 따라 걸어 볼 생각입니다.
도성 밖 외진 섬
1861년 제작된 『대동여지도』중 「도성도」에 표기된 여의도와 밤섬. [서울역사아카이브]
조선시대 여의도는 성 밖 십리 외진 섬이었습니다. 여의도의 순우리말 지명은 드넓은 섬이라는 뜻의 ‘너벌섬’이었습니다. 문헌상에 등장하는 잉화도(仍火島), 나의도(羅衣島), 여의도(汝矣島) 등의 이름은 모두 이 ‘너벌섬’이라는 이름을 음차한 것입니다. 섬에는 이름에 걸맞게 눈부신 백사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1884년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퍼시벌 로웰이 촬영한 여의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여의도의 사진이다. [보스턴미술관]
섬은 토질이 모래인데다가 여름 홍수마다 물속에 잠기기 일쑤라 농사를 짓기에 부적합했습니다. 동물들이 밖으로 도망칠 수 없는 섬의 특성을 활용해 조선 왕실은 이곳을 국영 방목장으로 사용했습니다. 조선 말 편찬된 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이곳에서 양 60여 마리와 염소 50여 마리를 방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래바람 날리는 비행장
1930년 촬영된 경성비행장. [서울역사편찬원]
모래 가득한 허허벌판이 쓰임을 찾은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의도는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의 소연병장 정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일제는 중심지인 사대문 안과 가깝고, 사람이 살지 않아 개발이 용이한 점에서 이 섬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1916년 이곳에 경성비행장을 건설합니다. 당시 비행장은 각종 관제시설이 필요하지 않은, 그저 넓은 활주로만 확보된다면 가능했던 초보적인 단계였습니다. 근처에 산이 없고 지형이 굴곡 없이 평탄한데다 용산 군부대와 인접한 여의도는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1923년 일본 잡지 ‘역사사진’에 실린 안창남 비행사(왼쪽)과 1936년 경성비행장을 통해 귀국하는 베를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서울역사아카이브]
경성비행장은 점차 규모를 확장합니다. 1929년에는 만주-여의도-도쿄를 잇는 여객 항공노선이 취항하기도 했습니다. 1922년 대한민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 고국 방문 비행 당시와 1936년 베를림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가 경성비행장을 통해 귀국하던 때엔 여의도 벌판이 영웅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온 수만명의 인파로 가득 찼다고 전해집니다.
1945년 촬영된 여의도 비행장의 전경(왼쪽)과 한국전쟁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서 출격 대기중인 F-51D 전투기(오른쪽). [국사편찬위원회·서울시]
1945년 미 공군이 촬영한 여의도의 전경. [서울역사아카이브]
여의도는 대한민국 공군의 성장 요람이었습니다. 해방으로부터 1955년 반환까지, 여의도 비행장은 미군 공군기지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1948년 5월, 조선경비대 항공부대가 창설되었고 이듬해 최초의 비행단인 공군비행단(현 1전투비행단)이 탄생합니다. 공군이 새로 창설되었지만 제대로 활용할 전투기 한 대 없었습니다. 일제가 버리고 간 폐급 전투기라도 활용하려 했지만, 미군정이 허가하지 않아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1954년 2월 미군 장병 응원차 방한한 당대 최고의 스타 마릴린 먼로가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당시 먼로의 방한을 동행한 기자가 아이젠 하워 대통령이 한국전쟁 전선을 방문했을 때보다 많았고, 뜨거운 취재 열기에 모든 PX의 필름이 동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대한뉴스]
한국전쟁 이후 여의도 비행장은 여의도 국제공항으로 정식 개항합니다. 여의도 공항은 군사적 목적 뿐 아니라 여객·수송·우편 등의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홍수 때마다 침수되는 활주로에서 원활한 공항의 기능이 유지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에 민간 공항을 1958년 김포로, 군 비행장을 1971년 경기도 광주군(현 서울비행장)으로 이전하며 반세기 비행장의 역사를 마무리합니다.
1950년대 촬영된 영등포에서 여의도 비행장으로 가는 길목. 강 너머의 허허벌판이 여의도이다. [서울시]
여의도 개발의 시작
1966년 7월 집중 호우로 한강 일대가 범람해 시가지가 물에 잠겨 있다. [국가기록원·서울기록원]
1966년 7월 홍수는 다른 해에 비해 유독 더 쓰라렸습니다. 하루에 220mm가 넘는 폭우가 서울에 쏟아졌습니다. 당시 수해 사진을 살펴보면 한강에 인접한 동네에서는 물이 범람해 성인 허리춤까지 찬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강 수위는 위험수위를 훌쩍 넘는 10m를 기록했고, 강변 일대는 온통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하수도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넘치고 역류했습니다.

서울시는 부랴부랴 한강변 개발과 하수도 정비사업을 내놓습니다.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은 1967년 ‘한강개발 3개년계획’을 발표합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씨는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한강개발 3개년계획 입안 시기에 여의도 개발계획은 뒷전이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하더라도 여의도 일대 한강은 서울의 외곽 중 외곽이었고 핵심지인 사대문 내 개발이 우선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도심 개발로 시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고, 시의 끄트머리 섬 여의도에까지 손을 쓸 여력이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의외에 사건에서 여의도 개발계획의 싹이 틉니다. 홍수 이후 서울시는 한강대교부터 영등포까지의 제방을 정비하며 도로를 개설합니다. 이로서 수십만 평의 택지가 일순간의 생겨납니다. 서울로의 인구 유입이 폭증하던 시기, 증가하는 인구에 비해 주택수가 턱없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늘어난 택지는 보물 같은 땅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김 시장은 여의도에 제방을 쌓아 택지로 활용할 가능성을 보았고, 한강개발 3개년계획이 여의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다고 책의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여의도를 둘러 제방을 쌓는 대공사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밤섬 폭파와 윤중제 축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ㅇ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2」, 한울출판사

ㅇ서울역사박물관, 「돌격 건설! 김현옥 시장의 서울Ⅱ」

ㅇ서울역사박물관, 여의도 100년사 기획전시 <모래섬, 비행장, 빌딩숲 여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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