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7%의 기회…장애인·비장애인 ‘같이’ 관람하는 ‘가치봄’ 영화 관람해보니 [밀착취재]

조희연 2023. 6. 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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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에 한글자막·음성해설 붙인 상영 방식
월평균 2편 개봉, 1편당 전국서 약 50회 상영
1만회당 7회꼴… 영화관람권 제한될 수밖에

지난달 23일 찾은 서울 광진구의 한 영화관. 화요일 오후 7시에 시작한 영화는 ‘평일 퇴근 시간 직후’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상영관 좌석 70%가 차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 불이 켜지자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영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케인(시각장애인용 지팡이)을 손에 쥔 이들과 수어로 소통하는 이들의 비율이 확연히 높았다.

이날 해당 상영관은 영화 ‘리바운드’를 ‘가치봄’으로 상영했다. 가치봄 영화는 시·청각 장애인의 영화 관람권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 영화에 한글자막과 음성해설을 덧붙인 상영방식이다. 통상 영화관은 한국 영화 상영 시 자막을 제공하지 않아 청각장애인이 관람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가치봄 영화는 외국 영화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영상처럼 스크린 하단에 배우의 대사를 자막으로 제공해 청각장애인의 영화 관람을 돕고 있다.
서울의 한 영화관을 찾은 시민들이 상영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음성 해설은 배우들 대사 사이에 장면을 묘사하는 내레이션을 삽입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농구 코치가 학생의 어깨를 잡는 장면이 나오자 “허 코치가 재윤의 어깨를 탁 잡는다. 재윤의 눈빛이 단단해진다”라고 설명해주는 식이다.

이날 가치봄 영화 관람을 위해 영화관을 찾은 시·청각 장애인은 “가치봄 상영 횟수와 개봉 편수가 저조해 아쉽다”며 “가치봄 영화가 더 늘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영화 상영 1만회 중 가치봄은 7회뿐

“가치봄으로 상영하지 않아서 못 본 영화가 정말 너무 많아요.” 농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청각장애인 박준수(33)씨는 “주말에는 가치봄 영화가 잘 없다”며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려면 평일에 퇴근하고 와야 한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농인은 눈으로 보는 게 중요해서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으로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데, 자주 볼 수 없어서 아쉽다”고 덧붙였다.

8개월 만에 영화관을 찾았다는 이진용(46)씨도 “외국 영화는 가치봄 상영이 제한돼 아쉽다”고 토로했다. 2015년 시각장애를 갖게 된 그는 “원래 ‘분노의 질주’ 시리즈나 마블 영화를 좋아했는데 가치봄 영화로는 나오지 않아서 (시각장애를 가진 뒤로는) 못 보고 있다”며 “얼마 전에 나온 슬램덩크도 못 봐서 정말 아쉬웠다”고 말했다.

3일 한국 농아인협회에 따르면, 가치봄 영화는 월평균 2편 개봉하고 1편당 전국에서 약 50회 상영되고 있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계를 봐도 국내 3대 영화관(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이 지난해 상영한 가치봄 영화는 전체 상영 횟수(534만7227회) 중 단 419회에 불과했다. 1만회당 7회꼴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 21조는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 등에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상영 횟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실정이다.

이에 따라 시·청각 장애인의 영화관람권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영진위는 ‘장애인 동시관람 상영시스템 시범상영관 운영 및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시·청각 장애인 10명 중 4명은 ‘지난 1년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적 없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시각장애인이 61.1%로 가장 높았고, 청각장애인은 29.2%, 비장애인은 15.4%에 그쳤다.
한 영화관에서 시각, 청각 장애인들이 영화관람 보조시스템을 시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치봄은 장애인·비장애인 ‘함께’ 즐기는 영화”

가치봄 영화를 관람한 비장애인도 가치봄 상영 확대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치봄 영화를 이날 처음 접했다는 권다빈(31)씨는 “이렇게 (자막과 해설을) 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서 “다른 사람들도 가치봄 영화를 직접 접해보면 가치봄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상영관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가치봄 영화가 장애인뿐 아니라 비장애인의 영화 이해를 돕는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전덕윤(31)씨는 “처음에는 자막과 음성 해설이 어색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며 “자막과 해설이 배우들의 표정이나 감정을 잘 설명해준 덕에 (장면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 시작 전까지 가치봄 영화라는 걸 몰랐다는 조은경(23)·윤규진(24)씨는 “해설 타이밍이 장면과 맞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지적하면서도 “음성해설에 적응한 뒤로는 음성 해설이 오히려 더 웃기고 좋았다”고 평가했다. 영화의 웃음 포인트를 음성 해설이 적나라하게 짚어줬다는 설명이다.

가치봄 영화 비중을 얼마나 늘릴 것인지는 아직 법적 다툼 중이다. 시·청각 장애인들이 대형 영화관에 대해 제기한 차별 구제소송에서 2심 법원은 ‘300석 이상 좌석 수를 가진 상영관은 주말을 포함해 전체 상영횟수의 3%만큼 화면해설과 자막을 제공하라’고 판결했다. 영화관 3사는 이에 불복해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영화관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장애인 영화 관람권은) 영화업계 이해관계자와 장애인단체가 함께 논의해가야 하는 문제”라며 “극장의 힘만으로는 가치봄 상영을 늘리거나 동시상영 장비를 구비하는 데 한계가 있고, 정부가 관련 예산을 늘려주는 등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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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 기자 ch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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