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통장’에 더치페이 부부, 한쪽 병원비 부담 커지자…

한겨레 2023. 6. 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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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
‘통장 분리’와 부부 건강
아이 없는 맞벌이, ‘돈 관리’도 따로
부인 투병…휴직에 경제사정 악화
병원비 부담 때문에 결국 이혼
고립감에 알코올 의존·우울증으로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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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가명)씨는 30대 후반의 여성으로 회사에서 재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영미씨는 사내 커플로 결혼했고 남편은 영업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느 젊은 부부와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영미씨 부부는 ‘딩크족’입니다.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인 거죠. 영미씨 부부는 또래 친구들처럼 육아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남은 수입으로는 골프와 쇼핑을 하며 여가 시간을 보냅니다. 영미씨와 남편은 결혼 뒤 ‘가족’이라는 제도에 복잡하게 얽매이기보다는 서로 개인적인 부분을 존중하는 삶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기를 가지는 것 또한 ‘부부의 선택’이며, 아이를 위해 둘만의 시간을 희생할 생각은 없습니다. 대신에 반려동물로 고양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영미씨와 남편은 경제적으로도 분리해 생활하고 있습니다. 통장도 따로 갖고 수입도 각자 관리합니다. 식사를 하거나 골프를 치러 갈 때는 항상 더치페이를 합니다. 둘이 함께 지출해야 할 때는 서로 논의해 치러야 할 몫을 정합니다. 부부가 공용 통장으로 돈을 이체한 뒤 공용 카드로 결제하는 방식입니다. 부부간에 거리가 느껴질 때도 있지만 요즘 영미씨 주변에도 이렇게 분리해서 사는 부부가 많다고 합니다. 육아라는 물리적·경제적 공동과업이 존재하지 않아 생활을 쉽게 꾸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남편한테 돈 빌리고 채무이행각서

그러던 어느 날 영미씨는 몸이 너무 피곤하고 얼굴이 검게 변해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 신장 기능이 심각하게 떨어져서 정상의 20%밖에 남지 않았다는 판정을 받게 됐습니다. 영미씨는 병가를 내고 회사도 쉬게 됐습니다. 영미씨 남편은 영미씨 건강 걱정을 많이 했지만,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부인의 경제적 능력이 예전 정도로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원비도 영미씨가 모두 부담했는데 점점 액수가 커졌고 영미씨가 회사를 다니며 그동안 모아둔 자금이 거의 바닥날 지경이 됐습니다. 그는 병원비로 남편에게 돈을 빌리면서 채무이행각서까지 썼습니다. 결국 영미씨는 더 이상 남편에게 부담을 주기는 싫어졌고, 남편도 어느 순간부터 본인이 생각한 결혼 생활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영미씨 부부는 변호사와 법률 상담을 했습니다. 아이도 없고 재산이 완전히 분리돼 있기 때문에 쉽게 이혼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부부는 이혼을 했고 가끔씩 만나는 친구로 지내기로 했습니다. 함께 집에서 살지 않으니 점점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었습니다. 영미씨는 몸도 아픈데다가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상실감과 외로움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혼 뒤 영미씨는 고혈압·당뇨·고지혈증 등이 생겨 내과에서 추가로 치료를 받게 됐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실패작이라고 우울해하는 영미씨에게 내과 선생님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추천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방문하게 된 영미씨는 우울한 기분과 외로움, 무가치감 등 주요 우울증 증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영미씨의 어머니가 집에 와서 간병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영미씨 어머니도 암으로 항암치료를 받게 되면서, 더 이상 간병을 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영미씨는 남편을 다시 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남편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완전히 떠난 것으로 생각하고는 눈물이 났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영미씨는 매일 혼자 집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우울증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무인도에 혼자 사는 것처럼 고립돼 있었습니다. 자신의 건강이 언제까지나 유지되고 젊음이 계속될 것 같았지만 이제 돌이켜보니 불과 몇년 만에 신기루처럼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건강 되찾고 복직·재결합

정신건강의학과 주치의는 영미씨에게 고립감에서 벗어나야 하며, ‘혼술’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영미씨처럼 신장 기능이 저하된 환자가 우울증까지 겹치면 자기 관리 능력이 떨어지고 질병에 대한 대처가 안 돼 신장 기능을 더욱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당뇨병이 있는 환자에게도 우울증이 오면 활동량이 떨어지고 당뇨 조절이 잘되지 않아 신장 기능은 더욱 떨어질 수 있습니다. 우울증 치료를 통해 우울감과 의욕이 회복되면 신장 기능과 당뇨를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영미씨는 지금부터라도 이전에 만나던 사람들을 조금씩 다시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기증자의 신장을 이식받게 되면서 건강도 빠르게 회복됐습니다. 신장을 이식받은 뒤에는 면역 억제제를 복용하면서 ‘절대 금주’ 하기로 했습니다. 신장이 거부반응 없이 잘 자리 잡기 위해서는 혈당과 혈압 조절이 잘돼야 합니다. 내과 진료를 통해 철저하게 모니터링하고 조절하기로 했습니다.

영미씨는 우울증 치료 뒤 다시 회사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재혼하지 않은 남편을 다시 만나 과거는 모두 잊고 재결합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영미씨 부부는 각자 분리해 살던 삶에서 하나의 가족으로 합치기로 했습니다. 경제적인 부분도 하나로 합치고 아기도 가져보기로 했습니다.

이제 영미씨는 부부가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됐습니다. 경제적으로 분리해서 자신만의 삶을 산다면 가족에게 위기가 닥칠 때 서로 돕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기를 가지는 것은 부부의 선택이지만 부부가 마음이 하나로 합쳐져야 아기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썼습니다. 글에 나오는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경우를 통합해서 만들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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