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앤 무비] ⑦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아버지의 길'

김동철 2023. 6. 4.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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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영상이 문자를 압도하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연합뉴스는 OTT(온라인동영상 서비스) 시대에 발맞춰 전북지역 현안과 사건·사고를 톺아보고 이를 영화, 문헌과 접목해 인문학적 고찰을 시도하는 기사를 2주에 한 번씩 10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아버지의 길'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전주=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 눈물을 삼킨 가장의 어깨는 무겁다.

내전 후유증으로 공공 시스템이 무너진 세르비아의 한 작은 마을. 허름한 행색의 어머니가 딸의 손을 붙잡고 남편의 공장으로 향한다.

남편의 밀린 월급과 퇴직수당을 받기 위해서다. 그는 "우린 너무 배가 고파요. 애들이랑 그냥 죽어버릴래요"라며 휘발유를 끼얹고 체념한 표정으로 몸에 불을 붙인다.

다행히 목숨은 건지지만, 옆에서 이를 지켜본 아이들은 긴급 보호 조치로 사회복지센터로 넘겨진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남편 니콜라(고란 보그단)는 행정의 벽에 막히자 부당함을 알리려고 걷고 또 걷는다.

2021년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인 슬로단 고르보비치 감독의 '아버지의 길'은 궁핍으로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가장의 분투기를 담고 있다.

니콜라는 해고당한 일용직 노동자다. 집에는 두 달째 전기와 수도가 끊겼고 가족들은 굶주림에 시달린다.

아내의 분신 소식을 들은 니콜라는 아이들을 돌려달라고 호소하지만, 행정당국은 열악한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는 냉담한 반응뿐이다.

행정은 가난한 부모는 자식을 키울 수 없다고 기계적으로 판단해버린다.

집 상태를 점검하러 온 복지센터 직원들은 하루를 버티기에 버거운 그에게 아이들에게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더욱이 센터장은 "아동의 이익이 최우선"이라는 번드르르한 말만 되풀이하면서 아이들을 위탁보호로 보낸 뒤 지원금을 챙기는 비리 관료다.

영화 '아버지의 길'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니콜라는 단식투쟁을 선언하지만, "왜 꼴사납게 굴어. 당신들이 단식투쟁을 하든 자살하든 결정권은 우리에게 있어"라는 대답만 돌아온다.

절망에 가득 찬 니콜라는 복지부 장관을 직접 만나 이의 신청을 하려고 300㎞ 떨어진 수도 베오그라드로 차비조차 없이 무모한 여정을 시작한다.

허름한 배낭에는 물통과 담요 한 장, 허기를 채울 빵 쪼가리가 전부다. 플라스틱 물통에 수돗물을 담는 장면은 극현실적이다.

니콜라는 고속도로 갓길과 시골길을 걷고 또 걷는다. 누군가는 잠깐 트럭에 태워주기도 또 누군가는 약간의 먹을 것을 주며 그와 '연대'한다.

빵 쪼가리로 끼니를 때우며 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거리에서 잠든 모습이 되풀이된다.

탈진해서 쓰러지고 물집이 터져 피가 나는 발가락 때문에 절뚝거리면서도 계속 걷는다. 몸은 점점 쇠약해지지만 멈추지 않는다.

꼬박 닷새를 걸어 도착한 그는 장관 대신에 차관을 만나 권고서를 받았지만 말 그대로 '권고'에 그친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쓸쓸히 집에 돌아온 니콜라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낡은 집안 살림살이가 모조리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웃들이 텔레비전과 식탁, 식기, 벽시계, 심지어 딸의 인형까지 모두 다 가져간 것이다.

니콜라는 동네를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되찾아온다.

그리고선 네 식구가 앉았던 식탁 앞에 홀로 앉아 메마른 빵을 욱여넣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에게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 '아버지의 길'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슬로단 고르보비치 감독은 "사회에 외면당한 한 남성이 존엄성을 회복해가는 영화"라며 "이 남자는 사회에 저항하는 상징이 되고 싶어 하지 않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그의 작은 몸짓이 거대하고 부패한 시스템에 대한 저항처럼 비칠 수 있다"고 작품을 소개했다.

감독은 개인의 힘으로 극복이 불가능한 빈곤 문제의 해결책에 대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지원이 아니다"라며 "이들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정상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영화의 모습은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있다.

전주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가 최근 펴낸 '노동기본권 사각지대 전주시 취약 노동자 현황 및 지원정책 실태 연구'에 따르면 2022년 전북도 비정규직 규모는 전체 임금노동자 63만7천명 중 28만명으로 44%에 달한다.

전국은 전체 임금노동자 2천172만4천명 중 815만6천명으로 38%이며, 전북은 전국 평균보다 6%P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5시간 초단시간 근무는 전국 평균보다 3%P 높은 8%로 집계됐다. 월 소득 최저임금 미만 노동자 비중은 여성이 71%, 남성 29%로 여성이 두배 이상 많았다.

염경석 전주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장은 "90% 이상 노동자가 영세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하고 초단기 고용계약 불안정노동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많은 전주시의 경우 노동 현실은 더 열악한 조건에서 장기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며 "노동환경이 열악한 지역일수록 지방정부가 앞장서 적극적으로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처럼 우리 시대의 니콜라는 오늘도 신분상의 불안정을 감수하면서 버티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사랑 없이 녹록지 않은 인생을 산 배우 성동일은 과거 한 방송에서 "아이들이 피자 먹는다고 할 때 돈 생각 안 하고 '먹어'할 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며 "그 맛을 들이니 이제 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아버지라면 알 것이다. 이 말에 담겨 있는 밥벌이의 무거움에 대하여.

※ 참고 자료 : 전주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노동기본권 사각지대 전주시 취약 노동자 현황 및 지원정책 실태 연구'

sollens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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