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 수술하러 출동합니다…환자는 부러진 라일락"[이비슬의 B터뷰]

이비슬 기자 입력 2023. 6. 4.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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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준원 나무의사…증상 '말 못하는' 나무 어떻게 진료할까
가운 대신 '등산화·흙 묻은 배낭'…왕진가방 챙겨 외과수술

[편집자주] 모두가 열광하는 주인공보다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분들이 B터뷰의 주인공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담아보려 한다.

2일 경기도 화성시의 한 공원에서 나무의사 윤준원씨(61)가 토양 상태를 진단하고 있다. 23.06.02/뉴스1 ⓒ 뉴스1 이비슬 기자

(서울=뉴스1) 이비슬 기자 = "놀이공원 근처에 오래된 칠엽수가 있어요. 쓰러지면 사람들이 다칠까 봐 걱정되는데 검사받을 수 있을까요?"

나무병원에 새로운 환자 진료가 접수됐다. 다만 환자는 증상을 말하지 못한다. 나무의사 윤준원씨(61)는 현장으로 출동해 환자 곳곳에 센서용 못을 박아 넣는다.

각 센서의 음파 도달 속도를 분석해 이상이 생긴 위치를 파악하는 정밀검사가 이어진다. 사람으로 치면 컴퓨터 단층촬영(CT)으로 몸속 구석구석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나무의사는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가 아니다. 윤씨는 실제로 나무를 진료하는 의사다. 겉보기엔 멀쩡한 나무라도 의사인 그는 병충해를 입거나 속부터 썩어 부러지는 '이상 징후'를 감지한다.

윤씨는 "나무에 문제가 생기면 종종 외과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무의사 제도 5년간 시범운영 종료…6월 본격 시행 5년 차 나무의사인 윤씨는 007 요원을 떠올리게 하는 은색 왕진가방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등산화와 등산 모자를 착용하고 흙 묻은 배낭을 짊어진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한 의사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윤씨는 "나무의사는 나무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진단, 치료, 예방 조치를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며 "사람은 아프면 병원에 찾아오지만, 나무는 서 있기 때문에 의사가 찾아가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

나무의사 제도는 지난 5년간 유예 기간을 거쳐 이달 28일부터 시행된다. 앞으로 병든 나무 진단과 치료는 나무의사와 수목치료기술자를 고용한 나무병원만에서만 가능하다.

제도는 과거 사설 업체를 통한 아파트, 학교 내 수목 방제 작업에 농약을 오남용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국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취지로 2018년 도입됐다. 나무의사에게는 국가 자격시험 통과 자격이 필수다.

윤씨는 "최근엔 지자체 요청을 받아 공원에 진료를 나가거나 기업 옥상정원, 비싼 나무를 키우는 개인 주택에 찾아가기도 한다"며 "귀하게 키우던 라일락 가지가 부러져 보호자로부터 수술 의뢰를 받은 일도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식목일을 하루 앞둔 지난달 4일 충남 홍성군 서부면 상황리 일대 산이 검게 그을려 있다. 사흘동안 지속된 홍성 산불은 1454ha 규모의 피해를 입히고 완진됐다. 2023.4.4/뉴스1 ⓒ News1 김기태 기자

◇ 매주 전국팔도 산행 진료…수목원서 학술 세미나도

나무의사 중에서도 문화재 수리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윤씨는 매주 전국을 돌며 자연유산이나 천연기념물을 치료하고 있다. 기업을 퇴직 후 농식물 관련 전문가로 일한 지도 10년이 넘었다.

윤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로 경남 하동 지역에 있는 천연기념물 송림을 꼽았다. 하동송림은 조선 영조 시절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섬진강 일대에 900주 넘는 소나무를 심어 형성된 숲이다.

그는 "2년여 전 하동송림에서 병해충 치료를 한적이 있는데 최근 근처를 지나가면서 보니 소나무들이 다시 잘 자라고 있어 뿌듯했다"고 말했다.

외과수술은 나무의사의 의술이 가장 빛을 발하는 작업이다. 수명이 오래돼 늙은 나무에 구멍이 생기면 물이 고여 썩거나 나무가 죽기도 한다.

윤씨는 "사람은 수술 후 새살이 돋지만 나무는 죽은 부분이 회복되지 않는다"며 "나무를 소독한 뒤 보충제를 채워 넣어 준 다음 방수와 마감 처리를 통해 더 이상 썩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무의사들은 '학술 세미나'도 수목원에서 연다. 직접 나무를 관찰하며 진료 방법을 공유하거나 토론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다.

그는 "주변에서 '이 나무가 왜 죽었냐'고 물어보면 여전히 막막할 때도 있다"며 "선배들처럼 더 빨리 원인을 찾아내는 안목을 길러야겠다"고 웃어 보였다.

2일 경기도 화성시의 한 공원에서 나무의사 윤준원씨(61)가 나무의 활력도를 살펴보고 있다. 23.06.02/뉴스1 ⓒ 뉴스1 이비슬 기자

◇ 간판 가린다고 가로수 죽여…"생활권 고려한 수종 필요"

최근 뚜렷하게 나타나는 기후 변화 현상으로 아픈 나무도 증가하는 추세다. 도시에선 간판을 가린다는 이유로 가로수를 고사시키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윤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나무는 온대림에 적합한 나무인데 날씨가 아열대성으로 변하고 있어 고사할 위험이 커졌다"며 "기후나 도심 생활권에 적합한 수종으로 부분적 교체도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나무관리에 소홀한 결과는 도심에서 더 크게 맞닥뜨리게 된다. 열섬현상, 미세먼지, 산사태, 태풍 피해 완화나 방지에 나무와 산림 의존도는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윤씨는 "겨울철 과도한 염화칼슘 사용도 나무를 병들게 할 수 있어 최소화하는 편이 좋다"며 "변화한 기후나 환경에 맞는 수종을 늘려나가 앞으로는 죽어가는 나무가 줄어들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화 중간중간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듯 근처에 있던 나무의 치료 흔적을 올려다보던 윤씨는 잠시 몸을 일으켜 환자에게 다가갔다. 큰 상처가 아닌 것을 확인한 뒤에야 편안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번졌다.

"나무가 자연스럽게 회복하면 좋을 텐데 제가 괜히 손을 대서 더 나빠지지 않았으면 하죠. 진료를 할 때마다 '너를 그냥 뒀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b3@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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