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슬기의 언더뷰] "장애를 극복하려고 연기상 받은 게 아니다"
[장슬기의 언더뷰] 배우 하지성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하지성 배우는 최근에 열린 제59회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에서 연기상을 받았다. 하 배우는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휠체어에 앉은 사람의 높이에 맞는 마이크 거치대는 준비되지 않았다. 이는 그의 수상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비장애인 배우들과 다른 대우를 받았고, 소감을 말하기도 전에 장애인이라는 사실로 먼저 주목받았다.
하지성 배우에게 연기상을 안겨준 작품은 지난해 11월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무장애(배리어프리) 연극 〈틴에이지 딕〉이다. 셰익스피어의 연극 〈리처드 3세〉를 모티브로 삼았으며, 뇌병변장애가 있는 고등학생이 회장 선거에 출마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재탄생된 작품이다. 하 배우는 주인공 리처드 글로스터 역을 맡아 열연했는데 수상소감에서 “연극 속 역할처럼 학생회장이 된 것 같다”고도 했다.
이미 여러 장애인 배우가 활동하고 있지만 백상예술대상에서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기에 하지성 배우의 수상은 가볍지 않다. 그러나 배우가 장애인이란 정체성만으로 기억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5월 20일 서울 종로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하 배우를 만났다. 배우로서의 하지성을 주로 다루고 싶었지만, 정체성에 관련된 질문을 줄이기는 어려웠다. 인터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백상예술대상 연극 연기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당시 느낌이 궁금하다.
“상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쟁쟁한 후보도 많았고, 비장애인이 받을 확률이 높다는 생각도 했다. 호명되는 순간 연극을 해왔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데 감격스러웠다.”
연극 〈극단애인의 1인 무대〉에서 하 배우가 백상예술대상 수상소감을 전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상을 받았을 때 소회가 더 남달랐을 것 같다.
“언젠가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 서보고 죽어야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특히 백상예술대상은 드라마·영화·예능·다큐멘터리 등을 종합한 시상식이라서 의미가 크다. 배우인 나로서도 그렇고 장애가 있는 나로서도 '내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빨리 받을 줄은 진짜 몰랐다. 수상소감을 잘 정리해서 갔어야 했는데, 머릿속이 하얘져서 다 까먹었다(웃음).”
〈틴에이지 딕〉에서 주인공 리처드는 자신의 장애를 이용해 사람들을 유혹하거나 선동하고 장애인 친구에게 차별적 발언도 한다. 언론에선 '문제적 장애인'이라고 표현했다.
“난 '문제적 장애인'이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사회가 그렇게 만든 거다. 몸이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하고 친구들, 심지어 가족까지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나는 겉(외모)으로 드러나는 장애보다 그냥 한 사람으로서 본성과 욕망을 드러낸 것뿐이다.”
“고등학교 시절 TV가 친구였고 나도 배우가 돼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더라.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잘 섞이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해서 TV가 유일한 친구였다. TV를 보면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고 생각해 배우를 선택하게 됐다. 그러다가 고3 때 아는 형에게 진로 고민을 털어놨다. 배우를 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배우로서 가능성이 있을지가 고민이었다. 그 형이 극단에서 워크숍을 하는데 같이 가자고 했는데, 그게 장애인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극단 '애인'이었고 그때가 연극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면서 여기까지 왔다.”
연극으로는 먹고살기 힘들다고들 얘기하는데, 그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고민 안 했다. 연기가 너무 좋고 연기만 계속하고 싶어서. 부모님은 많이 반대하셨다. 그런데 그냥 한 귀로 흘려버렸다(웃음). 부모님을 설득해보긴 했는데 통하지 않더라. 그런데 재작년부터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는데, 부모님이 큰 무대를 좋아하시더라(웃음). 그러다가 이번에 상을 받으니까 완전히 인정하시는 거 같다.”
극단 애인의 공연 〈고도를 기다리며〉로 데뷔했으니까 벌써 배우 14년 차다. 그동안 연기나 연극에 대해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나?
“나만의 연기법이 생겼다. 그게 뭐냐면, 어떤 인물을 묘사한다기보다 그 인물의 목표나 목적을 생각한다. 비장애인 배우는 연기할 때 느낌을 어떻게 살릴까를 먼저 생각할 텐데 난 그걸 잘 못 한다. 그보다는 이 작품에서 하고 싶은 말이나 목적이 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장애연극'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고 들었다. '장애연극'이란 어떤 것인가?
“처음엔 '장애연기'나 '장애연극'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연기의 정체성이나 배우의 정체성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극단 애인에서 10년 동안 고민하고 비장애인과도 함께 연극을 하다 보니 분명히 내 연기 방식이 비장애인 배우의 그것과는 다르더라. 성격도 다르고 표현도 되게 달랐다. 비장애인의 연기가 있고, 나는 나만의 발화·호흡 등이 있다.”
한 인터뷰에서 “무대에서 장애를 느끼지 않는 순간이 내가 연기를 잘한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비장애인이 되고 싶은 거구나' 이것을 인정하니까 더 편해졌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비장애인이 되고 싶다는 걸 인정하면 정체성에 어긋나는 거 아냐? 장애인 연극을 못하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 살기 때문에 비장애인 배우의 연기가 정답처럼 여겨진다. 나 역시 비장애인 연기를 보면서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장애인으로서 연기를 하지만 비장애인 배우의 연기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다.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게 나의 정체성이자 연기이다.
특히 이번에 받은 연기상이 장애인 배우로서 대중 앞에서 최초로 받은 상이다 보니 참 조심스럽다. 내가 정답은 아니다. 나는 장애인 배우로서 내 호흡·발성·동선에 따라 연기하기로 했지만, (비장애인 배우들처럼) 자신의 호흡이 아니라 극중 인물의 호흡으로 연기하려는 장애인 배우도 있다. 그들을 만나보면 나와는 완전히 생각이 다를 거다.”
〈여기, 한때, 가가〉2021년를 시작으로 비장애 연극인과의 협업이 많아졌다.
“비장애인 배우들이 나로 인해 이동권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극장 접근성, 배리어프리에 대해 얘기한다. 당연한 일이긴 한데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비장애인 연극인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의 작업 환경에 놓이다 보니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언제 작업 환경이 동등하지 않다고 느끼는지, 그래서 어떤 방안을 논의했는지 궁금하다.
“예를 들어 배우에게 장애가 있는 경우에 종이 대본을 넘길 때 어느 쪽이 편한지 미리 알아보고 그에 맞춰 스테이플러를 찍어주는 것 등을 구체적으로 정해보는 식이다. 이러한 규칙들을 사전에 만들자는 뜻에서 연습하기 전에 공동규율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장애인 배우에 맞는 훈련법을 익히자는 취지로 진행된 '지체·뇌병변장애 배우들을 위한 워크숍'에 참여했다. 장애인 배우에게 맞는 연기법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나?
“극단 애인에서부터 항상 그래왔는데, 대본을 받으면 내 말과 움직임에 맞춰본다. 비장애인들이 볼 때는 내 움직임이 불안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저 내 고유한 떨림이고 움직임이다. 내 움직임을 발견하면서 최선의 연기 방식을 찾아가려고 한다. 얼마 전에 우리 극단의 배우가 비장애인과 협업 공연을 하는데 한 기자가 기사에서 “발성이 편하지 않은 배우”라고 하더라. 잘못된 표현이고 많이 속상했다. 편하지 않다는 건 비장애인 관점에서 해석한 거다.“
이번 백상예술대상에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의 박은빈 배우가 대상을 받았다.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 연기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장애인 배역마저 비장애인 배우가 연기하는 상황이 불편하다. 그러면 장애인 배우가 설 곳이 없어진다. 좋은 장애인 배우가 이미 많이 있다. 대여섯 개의 장애인 극단이 있고 배우들이 계속 활동하며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왜 장애인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는가. 이제 사회에서 이들을 캐스팅해야 한다. 드라마 〈우영우〉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주인공 우영우가 장애가 있으면서도 똑똑한 인물이라는 것 아닌가. (그런 취지라면) 장애인 배우가 연기를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다운증후군이 있는 정은혜 배우가 나온다.
”정은혜 배우는 자기만의 호흡, 자신의 스토리를 가지고 연기했다. 이런 게 (변화의) 시작이다.“
하지성 배우도 꾸준히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장애를 대상화하지 않는 작품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도전해보고 싶다. TV나 영화 등 '매체 연기'도 해보고 싶다. 제가 표정 연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도 있어서 대중들에게 더 자세히 보여주고 싶다. 게다가 배우라는 직업도 TV를 보면서 꿈꾸게 된 것이라서 매체 연기에 더 관심이 간다.“
롤모델로 삼는 배우가 있나?
”내 롤모델은 나다(웃음). 롤모델로 삼으면 그 사람을 닮게 되고 결국 비장애인 연기법을 따라 할 위험부담이 있어서 롤모델을 나로 정했다. 그렇기에 계속 다양한 나를 발견하고 싶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장애인 배우'로만 생각하며 일종의 증명을 요구할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볼 때 '장애'보다는 '인人', 그냥 사람에 초점을 두면 좋겠다. 심지어 백상예술대상 수상기사에서도 “장애를 극복했다”는 표현이 많았다. 나는 장애를 극복하려고 상을 받은 것이 아닌데… 그냥 사람으로 봐주면 좋은데 참 아쉽다. 기자들도 결국 사람의 이야기를 기사로 쓰는 건데, 장애만 너무 강조하지 말고 사람과 사람으로 이야기하면 좋겠다. 비장애인 사회에 살아왔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생각의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보통 배우라는 직업은 '감독·연출이 구상한 극중 인물을 잘 연기해내는 일'로 여겨지지만 하 배우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감독이나 연출의 구상을 벗어나 자신만의 표현법을 고민한다. 발음·발성·호흡·동선 등이 비장애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장애인 배우의 연기가 비장애인 배우의 연기와 다를 수 있고, 그럼에도 배우는 모두 배우이며 대중과 연기로 소통하려 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이번 인터뷰였다.
하지성 배우는 언론들이 이번 수상 소식을 '신선한 충격'이라고 표현한 사례를 언급하며 “장애인으로서 상을 받은 것도 의미가 있지만 나는 배우로서 존재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장애인으로서가 아니라 배우로서 더 주목받는 사회를 꿈꾸며 무대에 선다.
하 배우의 다음 작품은 박해성 연출의 〈미래의 동물〉이다. 7월부터 연습을 시작해 9월 8일부터 같은 달 17일까지 아르코·대학로 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 이 인터뷰는 장슬기 미디어오늘 기자가 참여연대 월간 매거진 '참여사회' 인터뷰어로 참여해 작성한 기사입니다. 참여사회 2023년 6월호(통권 306호)에 실렸습니다. 인터뷰 전문은 미디어오늘과 참여연대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뷰 인용 시 '참여사회' 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여연대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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