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소리의 경계… ‘소리 없이 빛나는’ 코다(CODA) [심층기획-말뿐인 공용어…설 곳 없는 한국수어(手語)]
오른 주먹의 검지를 펴서 코 오른쪽을 쓸어내리며 엄지를 편다. ‘아빠’. 똑같이 오른 주먹의 검지로 코 오른쪽을 쓸어내렸지만 이번에는 새끼 손가락을 편다. ‘엄마’.
‘소리가 들리는 상태’가 당연한 세상에선 수어가 설 곳이 없었다. “부모가 청각 장애인인데, 딸은 말을 하네?”, “저게 수어인가봐.” 장을 보러 마트에 가면 수어로 대화하는 다빈씨 가족을 보고 사람들은 쑥덕였다. 다빈씨는 수어를 이상하게 보는 세상이 오히려 낯설었다.
다빈씨는 음성 언어를 듣고 말할 수 있는 청인이지만,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은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s)이다. 수어로 소통하는 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를 뜻한다. 다빈씨와 같이 소리와 침묵의 세계 경계를 넘나드는 코다들에겐 농인의 세상과도, 청인의 세상과도 전혀 다른 ‘코다만의 고유한 세상’이 펼쳐졌다.
◆“아이에게 ‘통역’은 고된 일”…국가의 일 코다가 대신
코다는 피치 못하게 ‘통역사’ 역할을 맡게 된다. 부모와 세상의 연결고리가 된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어린 나이부터 동사무소와 병원, 학교 등을 오가며 어른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전하는 것은 분명 머리를 쥐어뜯게 하는 고난이다.
다빈씨가 8살 무렵 어머니 김옥미씨는 집으로 짜장면을 배달시켜 먹기로 ‘결심’했다. 청각장애가 있는 김씨에게 전화 주문이란 그야말로 ‘굳은 마음’이 필요한 일이었다. 10여년 전 그 시절엔 지금과 같이 모바일 배달 애플리케이션이 없었다. 김씨는 음식 목록과 집주소를 적어 다빈씨에게 주문해보겠느냐고 물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한국어를 빠르게 익힌 다빈씨는 자신이 있게 전화를 걸었다.
다빈씨는 병원에서 겪은 통역 난관을 회상했다. 어린 시절부터 병원에 가면 의사와 부모님 사이 통역을 도맡은 다빈씨는 “내가 잘못 통역해서 엄마가 진단을 제대로 못 받으면 어떡하지, 큰 병인데 모르고 지나치는 건 아닌가”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고 털어놨다.
두려운 마음에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조금 더 쉽게 설명해줄 순 없는지 몇 번이나 되물어야 했다. 학교에서도 통역 지원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다빈씨는 한살 터울의 동생 이승헌(19)군의 대학 입시 상담도 대신 했다. 이 과정에서 다빈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청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못내 아쉽고, 싫을 때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코다라서 행복”…농인 부모 덕분에 찾은 꿈
다빈씨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코다라는 사실이 새삼 행복한 순간으로 찾아왔다. 졸업식 며칠 전 담임선생님은 학부모들로부터 글이나 영상으로 편지를 받았다. 다빈씨는 당연히 어머니 김옥미씨가 글로 편지를 써주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졸업식 당일, 글로 된 편지 모음이 다 공개될 때까지 엄마의 편지가 나오질 않았다. 다빈씨는 ‘엄마가 깜박했나보다’ 하고 아쉬워했다.
다빈씨는 현재 대학에서 장애인 재활에 대해 공부하며 농인뿐 아니라 시청각장애 등 중복 장애인의 일상도 온전히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다빈씨는 “수어를 하면 농인들과 소통할 수 있고, 천천히 말하면 입모양을 보고 알아 듣는 농인도 많다”며 “농인의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사회가 결국 ‘장애’를 만드는 것이다. 서로 조금만 배려해주면 장애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농인도 청인도 아닌 ‘코다’만의 고유한 정체성
현화씨는 “농인 부모님 덕분에 자연스럽게 수어를 익혔고, 전문 수어통역사로 일하기도 했다”며 “내가 통역을 잘해서 한 개인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지만, 더 큰 틀인 정책적인 측면에서 도움이 되고 싶어 국립국어원에 들어와 수어사전 편찬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코다’로서의 삶이 현화씨를 이 자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물론 현화씨가 코다 정체성을 현재 긍정한다고, 코다로서의 삶이 안온했다는 것은 아니다. 유독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게 되는 어린 시절만큼은 현화씨도 수어를 쓰는 부모님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들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또 동사무소, 경찰서 등에서 부모님을 대신하여 어른들과 말을 주고 받을 때는 수많은 통역의 실패와 오류를 경험해야 했다.
◆‘코다 코리아’, 아시아 최초 코다국제컨퍼런스 개최
현화씨는 코다들이 모여 만든 커뮤니티 ‘코다 코리아’ 활동을 통해 코다 정체성을 더욱 긍정하며, 코다로서 가질 수 있는 풍부한 잠재력을 찾아 나누고 있다. 현화씨는 “모든 코다가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코다 중에도 양친 모두가 농인인지, 형제자매 중 농인이 있는지, 수어를 할 수 있는지 등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가정 환경 외에도 코다는 인종, 민족·국적,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 연령 등에 따라 다채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코다국제컨퍼런스에는 코다들만 참여가 가능하다. 현화씨는 “전 세계 코다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경을 초월한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 기회”라며 “코다라면 꼭 와서 코다로서 새로운 경험과 환대를 나누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심층기획-말뿐인 공용어…설 곳 없는 한국수어(手語)]
<상> ‘소리강요사회’ 속 외면받는 수어 교육
① [단독] 무늬뿐인 장애학생 통합교육, 특수학교 재학 절반은 전학생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29509059
② ‘청능주의의 폐해’… 농인 95%가 10살 넘어 수어 배운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29509101
③ 전국 특수학교 192개교 중 농학교는 14곳 불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29509100
<중> 수어통역, 법만 만들고 예산은 나 몰라라
④ [단독] 한 달 800건 넘게 수어 통역도… 격무에 이직 빈번 농인만 속앓이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0514742
⑤ TV자막 아바타수어 번역…예산 부족에 상용화 난항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0514732
<하> 문화 빈곤 시달리는 수어 사용자
⑥ [단독] 한글 단어에 수어만 연결 ‘반쪽 사전’… “유튜브 보고 배워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1516227
⑦ [단독] 청각장애인 10명 중 3명 “1년간 영화관람 못했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1516226
<다하지 못한 이야기>
⑧ 침묵과 소리의 경계… ‘소리 없이 빛나는’ 코다(CODA)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3504469
⑨ 농인 수어통역사를 아시나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3505351
⑩ 0.0007%의 기회…장애인·비장애인 ‘같이’ 관람하는 ‘가치봄’ 영화 관람해보니 [밀착취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4500189
글·사진= 김나현 기자 lapiz@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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