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소멸사회’, 정치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엔 이유가 있다

한겨레21 2023. 6. 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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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직전의 정치]수축사회를 넘어 소멸국가로
2023년 5월21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한 토론회에서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걱정하시는 분들을 만났다. 이러다가는 독도를 일본에 내줄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그분들께 ‘걱정 말라’고 말씀드렸다. 어차피 독도는 조만간 일본 땅이 될 테니 말이다.

유일 국가에서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으로

대한민국이 ‘수축사회’를 넘어 ‘소멸국가’로 착실하게 가고 있다. 출생률이 명확하게 보여준다. 2012년 1.3 수준이던 합계출산율은 10년 만인 2022년에 0.78로 떨어졌다. 놀라운 것은 속도다. 합계출산율 1.0이 붕괴한 때가 2018년이다. 그해 0.98이던 것이 불과 4년 만에 0.78까지 하락했다. 1.0에서 0.78까지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0.78에서 0.5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인구학자인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한겨레> 인터뷰(2022년 8월29일치)에서 ‘출산율이 0.5까지 떨어질 것이고, 마지막 골든타임은 앞으로 5년’이라고 했다. 그 원인으로 청년의 불확실한 미래와 여성에게 전가되는 ‘독박 육아’를 꼽았다. 대한민국의 ‘정해진 미래’는 229개 지방자치단체 중 절반이 직면한 ‘지방소멸’이 잘 보여준다고 했다. 지방이 소멸해도 모여 살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럴까? 서울의 2022년 합계출산율은 0.59였다.

국가의 합계출산율이 0.5까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전대미문의 일이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1.0이 안 되는 국가도 한국이 유일한데, 0.5의 상황은 어떤 나라도 겪어보지 못했기에 예측이 어렵다. 다만 현재 소멸 위험 지역의 상황을 미뤄볼 때 한 가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다. 합계출산율이 0.5 수준이 되면 ‘회복탄력성’이 없어지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그대로 소멸해갈 것이다.

그러니 윤석열 정부에서 일본이 독도를 점령하든지 말든지,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 2024년이면 대한민국은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65살 이상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리라 예상된다. 혹시 한반도를 노리는 외세가 있다면, 그들은 ‘기다림’이라는 확실하고도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다. 한두 세대 안에 이 나라는 소멸하게 돼 있다.

갑자기 종식된 냉전 뒤 과속

한두 세대가 오랜 시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 한국은 저출생·고령화 말고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복합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주요한 요인은 국제 환경 변화와 에너지 전환이다.

한국은 전통적인 수출산업 국가였다. 수출경제로 세계 최빈국에서 10대 강국으로 탈바꿈했다. 세계 역사를 봐도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다. 수출로 이런 도약이 가능했던 외적 조건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환경이었다. 이른바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 간의 ‘냉전 장벽’은 한국이 수출 기반 산업을 차근차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 높은 장벽의 한편에서 한국은 비용이 많이 드는 안보를 미국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 있었다. 원조자금은 물론이고 안정적인 수출 판로도 마련됐다. 일본과 더불어 동북아의 배후 기지로서 한국의 성장은 미국이 바라는 바였다.

한국이 수출주도형 산업 국가로의 기반을 다지고 민주화까지 쟁취한 상황에서 갑자기 냉전이 종식됐다. ‘탈냉전 세계화’의 시대가 열렸다. 이 분위기에 편승한 한국은 갑자기 과속했다. 방향은 맞았지만 속도가 너무 빨랐고, 코너를 돌 때마다 작동해야 할 브레이크는 아직 장착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연히 사고가 났다. 김대중 정부는 부도난 국가를 빠르게 수습했다. 온 국민이 막대한 피해를 보았지만 수출 주력 산업을 보존했고, 미래 성장동력 기반도 새로 마련했다. 김대중 정부 이후 지난 20년간 한국은 반도체, 자동차, 조선, 휴대전화 등 핵심 제조업 분야에서 전세계로 수출망을 넓혔다. 한류 붐도 지역과 나라를 가리지 않았다. 수출 한국의 도약은 국제 환경의 절묘한 변화가 없었다면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26년 만의 최장기 무역적자

그런데 세 번째 시기가 다가왔다. ‘신냉전 패권주의’ 시대다. 신냉전 시대가 과거 냉전과 다른 점은 패권국가 사이의 ‘디커플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세계화로 촘촘해진 ‘밸류체인’은 전 지구적 수준에서 복잡하게 얽혔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미국과 중국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두 나라는 군사·경제적으로 패권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분야에서 격렬하게 다투는 것처럼 보이지만, 협력이 필수적인 분야에서는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문제는 ‘낀 나라’들이다.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이다. 신냉전 패권주의 시대에는 냉전시대 같은 ‘보호망’이 없다. 미국 편에 속했다고 미국이 안보나 경제에서 일방적으로 한국의 편의를 봐주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오히려 자국의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의 경제적·군사적 자원을 얼마든지 활용할 태세다. 보호망이 없는 반면, 비협조에 대한 ‘페널티’(징계)는 확실하다. 미국이 주도한 반도체동맹(CHIP4)이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한국 경제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맞는 이 세 번째 국제질서는 한국 경제에 ‘재앙’이다. 그동안 두 번의 국제 환경이 한국의 발전을 도왔다면, 신냉전 패권주의는 한국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다. 그 징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무역수지가 15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수출 감소도 8개월째 이어진다. 26년 만의 최장기 무역적자다. 이것이 과연 우연적 사건일까.

복합 위기의 또 다른 원인은 에너지 전환이다. 기후위기에 더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탄소 기반 경제의 지속 불가능성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나라별로 불균등하게 매장된 탄소배출 지하자원에 의존하는 경제는 신냉전 패권주의 시대에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제 기후위기는 비단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가 산업과 경제, 일자리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가 왔다.

탄소 에너지 시대의 종말은 중동의 변화에서 먼저 감지된다. 과거 석유 경제로 성장했던 아랍에미리트(UAE)는 두바이를 건설하고 중개무역의 나라가 됐다. 중동의 대표적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과의 관계 개선은 물론 그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게다가 중국에 판매한 석유의 대금을 위안화로 받는 것을 고려하고, 상하이에 본부를 둔 일명 ‘브릭스(BRICS) 신개발은행(NDB)’ 가입도 검토하고 있다. 이 움직임은 탄소경제 종말을 앞두고 미국의 대중동 전략이 변화한 결과다. 미국으로서는 중동이 과거보다 덜 중요해졌고, 그것을 내다본 중동의 친미 국가들도 제 살길을 찾아나섰다.

또 한 명의 전세사기 피해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2023년 5월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 농성장에서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들이 헌화를 하면서 울고 있다. 한겨레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정부와 국회는 왜 관심이 없을까

여기서도 문제는 한국이다. 미국과 유럽은 친환경 에너지를 새로운 무역규제와 공급망 전환의 수단으로 삼는다. 유럽의 완성차 업계가 제조공정에서 친환경 에너지만을 사용하는 ‘RE100’을 요구하면서 국내 부품사와의 계약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애플 등 미국의 대기업들 역시 RE100을 선언했다. 국내에서도 위기의식이 오죽하면 진보적 매체와 경제신문들이 함께 이 문제를 거론하겠는가.

그런데도 정부와 국회는 한가하다. 전 정부의 ‘탈원전’을 비판했던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RE100’이라는 용어 자체를 몰랐다가 낭패를 봤다. 용산에서 이 용어를 쓰기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인지 정부는 얼마 전 원전이 포함된 탈탄소(CF100)라는 개념을 들고나왔다. 세계는 이미 RE100으로 향하고 있다. 이 한국식 표준이 과연 세계시장에서 통할까?

손 놓고 있는 것은 정부만이 아니다. 2022년 말부터 국회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렸다. 평소 ‘규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반대하던 대기업들이 오히려 RE100 규제 법안을 만들어달라고 로비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에너지 전환을 할 의지가 없으니 국회라도 나서서 법으로 이행을 강제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상하게, 여러 기업이 조직적으로 움직였는데도 별 소득이 없었다고 한다. 기업은 정치보다 빠르다. 위기가 현실화하기 전에 움직이게 마련이다. 조금 있으면 지구적 밸류체인을 포기할 수 없는 선도적 기술기업이 먼저 한국을 탈출할 것이다. 한번 이 사건이 일어나면 탈출 바람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미래 가치를 내다보는 주식과 금융시장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국가 소멸을 앞두고 있고, 수출한국은 절벽에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일본이 ‘버블경제’의 파국 이후 ‘수축사회’로 긴 시간을 버텼던 것처럼, 한국도 이 고난의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 같다. 수축사회로 버티려면 국내 경제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부동산 거품이 서서히 꺼지는 것을 버틸 만큼 금융이 튼튼해야 하고, 수출 감소의 여파를 수용할 만큼 내수시장이 커야 한다. 한국은 둘 다 좋지 않다.

부동산은 이미 붕괴 중이다. 지금 터진 전세사기 사건은 위기의 전조에 불과하다. 고의로 사기를 친 수천 가구 정도로도 2조~3조원의 피해 규모가 예상된다. 2023년 말과 2024년에는 고의적 사기가 아닌 부동산 가격 하락에 따른 ‘깡통전세’ 물량이 수만에서 많게는 수십만 가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대부분 ‘갭투자’로 형성된 이 부동산의 매입금과 전세금은 금융시장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무역적자가 계속된 15개월 동안 국내경제를 뒷받침한 내수경기도 2023년 2분기 들어 하락세다. 전년보다 백화점 매출과 카드 소비가 줄었다. 소득 하위 계층에선 소득과 지출이 더 빠르게 줄고 있다.

문재인 정부 심판 vs 윤석열 정부 심판

이렇게 위기를 넘어 소멸로 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책임이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정부와 국회의 정치인이다. 그리고 이 사태를 팔짱 끼고 바라만 보는 사람도 바로 그들이다. 왜일까?

2024년 총선 때문이다. 거대 양당의 선거 프레임은 이미 정해졌다. 정부·여당은 ‘문재인 정부 심판’이고, 야당은 ‘윤석열 정부 심판’이다. 정부·여당이 지난 1년여간 여러 비판을 받으면서도 ‘전 정부 탓’ 프레임을 지속한 이유는 지난 총선의 기억 때문이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탄핵된 세력이 아직도 국회 권력을 차지한다며 ‘확실한 적폐 청산’을 요구했다. 결과는 180석 석권이었다. 국민의힘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정부 심판’으로 승리했다. 이 프레임을 지속하는 게 가장 확실한 승리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령 윤석열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문재인 전 대통령을 상기시키면 지지층이 결집하리라는 기대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 심판론’ 외에 다른 카드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이해된다. 두 정치세력은 ‘나라가 망할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인구 소멸도, 세계 질서의 변화도,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에도 아무 관심이 없다. 정부는 국가 경영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없고, 야당은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 야당은 정부가 외교와 경제를 망치고 있으니 ‘반사이익’을 누릴 준비를 하고 있다. 정부·여당은 국가의 미래가 아니라 집권세력과 지지세력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다. 나라가 망해도 좋은 것이다. 아니, 망하게 방치할수록 좋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는 게 더 설득력이 있느냐의 문제만 남았다. 물론 나라가 망하기 전에 ‘나의 공천’이라는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과거에도 이런 때가 없지 않았다. 조선을 청나라가 구하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일본이 구하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일본군을 끌어들였다. 전쟁이 벌어지는 곳은 한반도이고 죽는 이는 우리 국민이겠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 정치적 이익’과 ‘역시 내가 옳지 않았냐’는 증명이 그들에겐 더 중요했다. 그리고 나라가 망했다.

희망소멸사회

불쌍한 것은 결국 국민이다. 그중에서도 청년과 여성이다. 지금 대한민국 청년들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극심한 경쟁을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겪어내는 중이다. 그 경쟁에서 대부분은 불행해진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도 행복하지는 않다. 심지어 이 경쟁이 공정하지 않고 절대 공정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는다. 나는 지옥에 살지만 내 아이까지 지옥에 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이 아귀다툼의 실체를 너무나도 절실하게 체험했고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잘 알지만, 동시에 그것이 절대 바뀌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지난 세월 그들은 앞선 세대가 어떤 사람들인지 잘 봐서 알고 있다. 이 공동체에서는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도, 그것을 함께 이겨내겠다는 연대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경쟁을 통한 공정 능력사회’를 지향한 결과로서 ‘희망소멸사회’다. 저출생의 원인은 우리에게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희망이 완전히 소멸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아직 선거는 10개월이나 남았다. 우리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 실체를 보게 될 것이다.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

*정치학을 공부하고, 국회와 지방정부, 중앙정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이관후 건국대 교수가 2024년 4월10일 총선일을 디데이 삼아, 한국 정치에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칼럼이다. 이관후는 <시민의 조건, 민주주의를 읽는 시간> 등을 공동집필했고, <정치를 옹호함>을 우리말로 옮겼다. 4주마다 연재.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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