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현정화’로 도약하는 ‘삐약이’ 신유빈
“서비스·체력 보완해야 현정화 뛰어넘을 수 있어”
(시사저널=김경무 스포츠서울 전문기자)
자신의 턱에 닿을 듯 말 듯 높은 탁구대 앞에서 철모르게 공을 치던 꼬맹이 시절, 방송까지 타며 이목을 끌던 '탁구 신동'이 어느새 세계 최강 중국 핑퐁을 위협하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2년 전만 해도 전 국민적 사랑을 받는 유망주 '삐약이'일 뿐이었는데, 올해 한국 여자탁구 국가대표팀의 어엿한 '에이스'로 도약하더니 이젠 세계 탁구계를 깜짝 놀라게 한 주인공이 됐다. 여자단식 세계랭킹 20위, 여자복식 5위 신유빈(19·대한항공)이 그 주인공이다.
"한국 탁구의 모든 희망이 유빈이 게임에서 나와"
탁구인들은 1993년 스웨덴 예테보리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 만리장성 중국을 넘고 여자단식 금메달 쾌거를 이룬 현정화(현 한국마사회 여자팀 감독)를 떠올리며, 신유빈이 그의 뒤를 이을 재목감으로 마침내 세계무대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5월20일부터 28일까지 9일 동안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2023 국제탁구연맹(ITTF) 월드챔피언십(세계탁구선수권대회 개인전)은 신유빈이 몇 뼘 더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그런 무대였다.
그는 띠동갑인 전지희(31·미래에셋증권)와 짝을 이뤄 여자복식 준결승에서 세계랭킹 1위인 중국의 쑨잉샤-왕만위를 게임 스코어 3대0으로 완파하며 대회 최대 이변을 일으켰다. 이어 금메달까지 바라봤으나 결승에서는 7위인 중국의 첸멍-왕이디에게 0대3으로 패해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두 번씩이나 만리장성을 넘기에는 다소 힘이 달렸다.
1987년 인도 뉴델리 세계선수권대회 때 금메달을 딴 양영자-현정화 이후 36년 만에 나온 한국 여자탁구의 개인전 최고 메달이기에 감격은 더했다. 신유빈과 전지희가 물리친 쑨잉샤와 왕만위는 여자단식 세계랭킹 1·2위였고, 그래서 이들의 완승은 중국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탁구 소질, 자질적 측면에서 유빈이는 현정화 정도 레벨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중국의 세계 최강 선수들을 이기다니 정말 잘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대한항공에 입단한 어린 신유빈을 지난해 초까지 2년 남짓 지도했던 강문수 전 대한항공 감독은 이런 평가를 내놨다. 과거 초등학교 4학년이던 신유빈을 한국 청소년탁구대표단 훈련단장으로서 지도하기도 했던 강 전 감독은 "당시 유빈이는 감각, 박자, 순간 판단력이 괜찮았다. 열심히 하려 했다"며 될성부른 떡잎이었다고 회고했다.
2년 전 2021 미국 휴스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 한국 여자대표팀 코치로 신유빈을 지도했던 전혜경 포스코인터내셔널 여자팀 감독은 신유빈에 대해 "하체 중심에 안정감이 생기면서 (공) 임팩트가 좋아졌다. 랠리하는 동안에도 상대의 센 공을 받아낼 준비자세도 좋아졌다. 중심이 안정됐다. 그런 면에서 2년 전과 차이가 난다"며 "여자탁구 감독으로서도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고 극찬했다.
신유빈과 환상의 콤비를 이룬 전지희는 이번 결승 후 "유빈이가 지금 한국 여자탁구의 다른 길을 새로 만드는 느낌이었다. 책임감도 많은 것 같다. 한국 탁구의 모든 희망이 유빈이 게임에서 나오고, 전 국민이 많이 기대도 할 것 같다"고 파트너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9월 항저우아시안게임에 다시 출격 채비
아직 10대인 신유빈이 여자복식에서는 세계무대 금메달 가능성을 한껏 열어놨지만, 전성기 때의 현정화처럼 만리장성을 허물고 여자단식까지 제패하려면 해결해야 할 숙제도 많고, 갈 길이 먼 것도 사실이다. 신유빈은 이번 세계대회 여자단식에서 16강까지 올랐으나 세계 1위 쑨잉샤한테 0대4로 완패해 8강에 오르지 못하며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경기 후 그는 "세계 1위 선수와 경기할 수 있어 좋았고, 그만큼 부족한 점이 많이 드러난 것 같다. 연습할 때 보완해야 할 점을 많이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자신에 대해 "공을 다룰 줄 아는 컨트롤과 섬세함이 떨어지는 것 같다"며 "중국 선수들을 이기려면 기본실력이 있어야 해서 제 탁구 수준을 탄탄히 만드는 운동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다"고 스스로 지적하기도 했다.
현정화와 신유빈은 전형이 완전 다르다. 현정화는 오른손 펜홀더 전형으로 오돌도돌한 고무돌기가 솟아 있는 핌플 러버로 세계 최강에 등극했다. 반면 신유빈은 오른손 셰이크핸드 전형이다. 현정화는 핌플 러버로 공을 강하게 때리는 공격으로 득점을 많이 했고, 세계 최강 중국을 혼내줬다. 하지만 신유빈은 공을 때리기보다는 드라이브를 걸어 상대하는 전형으로 체력 소모가 많다. 최근에는 거의 모든 선수가 셰이크핸드 전형이어서 체력과 스핀이 좋은 중국 선수들을 넘어서기도 힘들다.
게다가 현재 여자단식 세계랭킹을 보면 1~6위가 중국 선수이고, 일본도 톱10 안에 2명이나 들어있다. 반면 한국은 신유빈이 20위로 가장 높고, 중국에서 귀화한 주천희(삼성생명)가 22위, 전지희는 34위다. 강문수 전 감독은 "신유빈이 세계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서비스를 더 위협적으로 보강해야 하고, 체력도 더 보완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는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탁구다. 유빈이는 더 많이 좌우로 움직여 포핸드 활용도도 높여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사실 한국 여자탁구는 현정화 은퇴 이후 오랫동안 그를 이을 후계자가 없어 답보와 침체를 거듭해 왔다. 특히 여자단식은 아시안게임이나 세계선수권, 올림픽에서 무기력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박해정, 류지혜, 김분식, 김무교 등이 좋은 기량을 선보이며 한국 여자탁구의 명맥을 이어가는 듯했으나 현정화와 같은 월드스타로는 발돋움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내 지도자들은 곽방방, 당예서, 석하정 등 중국 출신 선수들을 귀화시켜 여자탁구의 부족한 경쟁력을 채우려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A급이 아니었던 귀화 선수들은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무대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한국 여자탁구는 토종 에이스 없이 오랜 세월을 버텨왔다.
이번에 신유빈과 함께 뒤늦게 빛을 발한 전지희를 비롯해 최효주(한국마사회), 이은혜(대한항공), 김하영(대한항공), 주천희 등이 대표적인 현역 중국계 귀화 선수다. 2년 전 국가대표로 발탁돼 올해 귀화 선수들을 제치고 마침내 토종 에이스가 된 신유빈의 등장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 신유빈이 오는 9월로 다가온 제18회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중국과 일본 등의 세계적 강호들을 상대로 어떤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인가. 아시안게임에는 남녀 단·복식과 단체전, 혼합복식 등 7개 종목에 메달이 걸려 있다. 신유빈은 내년 파리올림픽도 대비해야 한다. 올림픽에는 남녀 복식 종목이 없다. 남녀 단식과 단체전, 혼합복식 등 5종목만 있다. 향후 2년 동안 탁구 신동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래서 더욱 이목을 끌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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