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5주년 맞아 새로운 ‘다리(The Bridge)’ 놓는 디바 박정현
(시사저널=김영대 음악 평론가)
박정현은 아직 우리말이 완벽하지 않다. 그런데 공연에서든 방송에서든 그가 말할 때나 노래할 때, 그 살짝 어색한 듯 불완전해 보이는 모습은 놀랍게도 장점이자 매력이 된다. 사람들은 그의 사랑스러운 어눌함에 미소를 짓는다. '열심히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를 연신 반복하는 그의 말에는 쉽게 찾기 어려운 진심이 담겨 있다. 가끔 어색하게 들리는 몇몇 표현을 들어도 관객들은 그걸 더 이상 낯설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때로는 솔직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풀어내고 관객들은 연신 애정이 담긴 웃음으로 박수를 치며 화답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그건 가수 박정현을 구성하는 그저 작은 매력의 일부일 뿐 본질은 아니라는 걸. 불이 꺼지고 밴드가 화려한 연주로 공연장을 가득 메울 테지만 그 어둠과 웅장한 소리를 뚫고 나오는 디바의 절창에 가슴이 멎고 소름이 돋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박정현이 데뷔 25주년을 맞아 펼친 공연 'The Bridge'다.
'디바' 박정현의 가창력, 그 본질은?
'다리'의 본질은 연결이다. 가수와 팬을, 과거와 현재를, 한 세대와 또 다른 세대를 연결해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박정현은 공연을 소개하며 여기에 또 다른 의미를 덧붙였다. 아직 닿지 못했던 새로운 팬들과의 소통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번 투어는 유독 다른 가수의 곡을 리메이크한, 그의 표현대로 '커버곡'이 많이 포함돼 있다. 일견 납득이 되는 선택이다. 데뷔 25년, 박정현은 여전히 최고의 가수지만 그 최고의 의미는 과거와 좀 달라졌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그는 최고의 '앨범' 아티스트였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데뷔곡 《나의 하루》를 비롯해 가요계의 역사를 뒤바꿔버린 걸작 《꿈에》 등 내놓는 모든 음반이 화제가 됐다. 음악차트를 좌지우지하면서 음반 그 자체로 한 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가수였다는 뜻이다. 물론 지금도 그의 레코딩들은 완성도에서 그 누구 못지않은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며 좋은 평가를 이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를 '음반' 속 히트곡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대중에게 박정현은 《꿈에》가 아닌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의 가수로 더 폭넓게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다.
'R&B 요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2011년 '나가수 신드롬' 이후 박정현은 신세대들과 음악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가수, 뮤지션들이 동경하는 뮤지션을 넘어 일약 '국민가수' 반열에 오른다. 물론 그 핵심은 압도적인 가창력에 있었다. 바보 같은 말이지만 박정현은 노래를 잘하는 가수다. 그는 사람들이 가창력을 논할 때 사용하는 체크리스트에 있는 모든 항목을 만족시킨다. 폭발적인 고음, 안정적인 발성, 정확한 음정, 현란한 기교와 애드리브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디바 박정현이 가진 장점의 전부라면 아마 그의 위상은 진작 위협받고도 남았을 것이다.
1990년대 말 박정현이 등장한 이후 모든 여자가수가 제2의 박정현을 꿈꿨지만 아직 그 누구도 그 위상에 근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음악성이다. 그런데 과연 음악성이 무엇일까. 나는 먼저 장르와 스타일에 구애됨 없이 그 어떤 음악이든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모든 패션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시킬 수 있는 패셔니스타와도 같다. 박정현의 무대 레퍼토리는 형형색색의 다양함 그 자체다.
그는 오로지 직접 불렀을 때 그 매력을 온전히 잘 소화시킬 수 있는 《꿈에》 같은 자신의 히트곡은 물론이고, 최신 K팝 곡들인 《꽃》(지수), 《예뻤어》(DAY6)의 트렌디한 사운드도 완전히 그만의 느낌으로 소화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낯설긴 해도 어색하지 않다는 점이 놀랍다. 시아(Sia)의 《Chandelier》나 아델(Adele)의 《Someone Like You》처럼 영어 가사의 메시지를 소화하는 데 그를 따라갈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주현미의 《비내리는 영동교》와 앙코르곡으로 열창한 송창식의 《푸르른 날》에 이르면 이 가수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일까가 새삼 궁금해진다.
단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하는 능력만이 좋은 가수의 본령이라면 아마 박정현에 필적할 가수들을 더 많이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박정현이 단순히 여러 장르를 솜씨 있게 부르는 가수 그 이상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해 내지는 못하는 듯싶다. 나는 그것을 정밀함과 자유로움의 완벽한 조화라 부르고 싶다. 박정현은 역대 그 어느 가수들 이상으로 오리지널과 커버곡 양쪽 모두에서 정교하고 완벽하게 곡을 소화하는 가수로 알려져 있다.
흔히 'CD를 씹어먹었다'는 표현도 쓰지만 그는 원하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원곡의 매력을 언제든 그대로 전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무서울 정도의 고음에서는 조금 내려왔지만 타고난 재능에 엄격한 자기관리가 더해져 오히려 안정적인 발성과 음처리는 2000년대 그의 20·30대 시절 전성기를 능가하는 기량으로 《미장원에서》와 같은 극악무도한 고난도 곡들을 너끈히 소화해 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박정현의 최고 매력과 재능은 단 한 번도 동일한 가창의 패턴을 보여주지 않는 변화무쌍함, 곡을 부르는 내내 마치 재즈에서 즉흥연주를 하듯 의도성과 우연성을 뒤섞어 음의 길을 새로 내는 자유로움에 있다.
정교함과 자유로움의 완벽한 하모니
아마도 이것은 그의 음악적 뿌리가 가스펠이라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가스펠 싱어들은 같은 곡을 늘 새로운 버전으로 부르는 데 익숙하고 관객의 성향과 호흡에 맞춰 실시간으로 감정선을 올리거나 내리며 현장과 소통하는 데 익숙하다. 박정현의 공연을 보다보면 분명 미리 연습되고 약속된 곡들임에도 그 현장 분위기에 맞춰 그가 끊임없이 곡의 느낌을 바꾼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아마 그런 이유이지 않을까. 심지어 이런 느낌은 계산된 정밀함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레코딩 버전의 음악들에서도 받을 수 있다. 실로 극히 드문 재능이다.
'The Bridge'를 통한 박정현의 의도는 너무도 명백했다. 그를 좋아하는, 그를 조금은 알고 있는, 그리고 그를 아직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모두 다가가 소통하겠다는, 어쩌면 다소 소박해 보이는 욕심이 그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범접하기 힘든 가창력으로 익숙한 음악 예능에 나와 패널들의 경탄 어린 눈빛을 끌어내는 것만으로 콘텐츠가 되는 가수 박정현.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노랫말이 인상적인 신곡 《그대라는 바다》의 절창에서 느껴지는 건 머무를 곳을 찾아 돌아오는 노회함이 아닌, 앞으로 25년 이상을 또 더 나아갈 새로운 항로를 점검하는 탐험가의 포부였다. 여전히 박정현은 최고의 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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