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쿠데타 얼룩진 타이 정치…‘대중 불복종’이 끝내 승리할까

한겨레 2023. 6. 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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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홍명교의 이상동몽][한겨레S] 홍명교의 이상동몽
타이 전진당 하원 선거 승리 이후
전진당, 민주화·진보적 가치 수용…연합 세력화 관건
피타 림짜른낫 전진당 대표가 지난 5월22일 다른 야당과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양해각서에 서명한 뒤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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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4일 타이 총선 결과는 대중적인 불복종 저항이 이룬 성취다. 하원 500석 중 152석을 확보한 전진당은 친자본적인 포퓰리즘 선동을 통한 투표 매수와 정경유착, 습관적 군부 쿠데타로 얼룩진 타이 정치에 실낱같은 희망의 길을 보여줬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딸(패통탄 친나왓)이 이끄는 타이인당(프아타이당)의 승리를 점쳤던 언론의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전진당의 승리 이유는 피타 림짜른낫 대표가 단순히 아이비리그 출신 엘리트여서, 잘생겨서가 아니다. 많은 청년들이 죽거나 다치고 투옥되면서 싸워온 3년에 걸친 항쟁을 전진당이 잘 수용했고, 사회 진보를 향한 대중의 요구를 당의 이념에 반영했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다. 기득권이 만든 법을 끊임없이 위반하며 지배체제에 도전해온 대중운동이 새로운 정치적 격변을 만든 것이다. 이는 친군부-친탁신으로 나뉜 채 민주주의와 평등을 억압해온 엄격한 계급구조와 정치 지형이 지배하는 타이 사회에서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승리’로 기록될 만하다.

과반 63석 부족…상원은 군부가 장악

2020년부터 ‘반군부’와 ‘왕실 개혁’을 요구해온 대중운동은 타이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전진당의 전신 미래전진당은 이 운동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고, 이를 빌미로 2020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되는 시련을 겪었다. 이런 좌절에도 전진당이 대중의 요구와 이념적 지향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은 중요하다. 전진당은 이번 선거에서 동성결혼 합법화, 불평등 해소, 노동시간 단축, 노조 활동 보장, 6개월의 유급 출산휴가, 징병제 폐지, 군주제 개혁 등을 내세웠고, 왕실 예산을 면밀히 조사하겠다고 약속했다. 전진당은 특히 왕실·관료제와 대립하는 ‘분권화’, 정경유착을 바탕으로 이윤을 축적해온 재벌 자본을 배격하는 ‘탈독점’, 근대화 이후 타이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온 군부세력에 반대하는 ‘탈군부’를 강조하며 기존 체제와의 결별을 분명히 했다.

물론 전진당의 승리를 두려워하는 기득권 세력은 방해 공작을 벌일 수 있다. 타이에서 쿠데타는 습관적으로 발발했고 군부는 헌법을 악용해 상원을 장악하고 있다. 전진당 대표 피타 림짜른랏이 총리가 되려면 올해 7월 중순까지 상·하원 의석(750석)의 과반인 376명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올해 5월22일 313석을 확보한 전진당 등 8개 정당이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양해각서에 서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63석이 모자라고, 친군부 의석을 정치적으로 굴복시켜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더구나 이 양해각서에는 ‘왕실모독죄 폐지’가 빠졌다. 다른 정당과의 연합을 위해 한발 물러선 것이다.

인상적 해프닝도 있었다. 전진당 대표단이 연립정부 구성을 위해 다른 야당들과 협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발전당을 만났는데, 지지자들이 “친군부 정당을 연립정부 성원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강력히 항의해 협상을 무산시켰다. 국가발전당은 2019년 총선에선 쁘라윳 짠오차 총리를 지지한 전력이 있다. 이처럼 전진당의 원칙적인 입장은 대중운동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통제와 감시에 기반한다. 선거 승리가 끝이 아님을, 무조건적이고 맹신적인 지지로는 운동의 성취를 지킬 수 없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군부와 타협한 전력이 있는 타이인당이 전진당과의 협상을 깨고 군부 쪽으로 선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진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할 경우 타이의 국내외 정책은 많은 변화를 겪을 수 있다. 총선 직후 기자회견에서 림짜른랏 대표는 “타이와 미얀마 사이에 인도주의적 지원의 통로를 만들 것”이라며 “이미 그렇게 할 법적 근거도 있으니 국제사회와 함께 미얀마 민중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밝혔다. 미-중 대립 상황에 대해서도 그는 “외교정책은 시대에 맞게 조정돼야 하며, 어느 한쪽 편을 들 필요는 없다. 세계 민중이 단결해 규율에 기반한 사회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중간국 외교를 천명했다.

타이는 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말레이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중국·베트남과 지리적 거리도 가깝다. 이 때문에 미국은 20세기 내내 타이를 동남아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 여겼다. 방콕엔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국 대사관이 있고, 곳곳에 미군 기지도 여럿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효과적으로 타이의 외교·경제 정책을 통제했다. 미국과 타이 군부는 중국 견제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지만 타이 군부가 ‘자국 내 민주주의 요구’를 최대 위협으로 느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공동의 위협이 사라지자 타이 군부와 미국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이다. 이 틈을 타고 중국은 타이를 일대일로 사업의 전략적 파트너로 상정하고 협력을 강화했다. 지난해 8월 중국은 타이에 전투기를 보내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했고 수년째 쿤밍과 방콕을 연결하는 고속철도도 건설되고 있다.

‘습관성 쿠데타’의 나라, 바뀔 수 있을까

전진당이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한다면 동남아 정세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연립정부 양해각서는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에서의 타이의 리더십을 회복하고 강대국과의 균형 잡힌 국제관계를 위한 외교정책을 펼친다”고 밝히고 있다. 올 3월 쁘라윳 총리는 미얀마 군부 정권 인사들을 비롯한 인도·방글라데시·중국·라오스 정부 및 싱크탱크와 함께 회의를 소집했는데, 이런 행동은 미얀마 군부의 회의 참가를 불허한다는 아세안 합의를 무시하는 것으로, 아세안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타이가 미얀마 민주세력과의 접촉을 통해 인도주의적 지원 등 적극적 역할을 펼치고, 군부에 ‘아세안 5대 요구(학살 중단 등)’ 이행을 압박할 수 있다면, 악무한(궁극에 끝없이 접근하려 하지만 끝내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던 미얀마 정세는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다.

타이와 관계를 강화해온 중국 입장에서 전진당의 승리가 반갑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2019년 전진당은 홍콩 항쟁에 지지 의사를 밝혔고, 최근에는 “위구르족의 중국 송환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중국 극우언론 <환구시보>가 전진당을 강하게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전진당은 명확하게 친중 혹은 친미를 천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민주주의와 평등의 원칙을 견지해 인도주의 위기에 빠진 미얀마 민중을 돕고, 학살에 명확하게 반대하는 것만으로도 이웃 나라로서 충분한 역할을 다할 수 있다.

올여름 방콕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상원 대다수는 전진당 연립정부에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이 높은데, 군부가 전진당 집권을 저지할 경우 거센 저항이 일어날 공산이 크다. 이런 압박이 우려된다면 군부는 전진당의 타협과 후퇴를 강제하려 할 것이다. 결국 키는 평범한 사람들의 불복종 저항이 쥐고 있는 셈이다.

전진당이 군부 개입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민중의 갈망을 계속 대변할 수 있을까? 대중운동이 살아 있는 한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재창당이나 연합정당, 보수와의 합종연횡 등 위로부터의 논의에 몰두했던 한국의 진보세력이 타이 상황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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