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로은퇴 시즌2] 말이 서툰 사람이 강사가 되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입력 2023. 6. 3. 10:28 수정 2023. 6. 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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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유비무환! 준비된 은퇴, 행복한 노후를 꾸리기 위한 실전 솔루션을 욜로은퇴 시즌2로 전합니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서울=뉴스1)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 어머니 집에 가끔 들러 집안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 어머니가 요즘 나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한다고 알려주었다. 어려서 말도 잘 못했는데 강의를 잘 하고 다니는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93세이신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연유는 있다. 우선 어릴 때 내가 유독 말을 늦게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다.

나는 12월에 태어나다 보니 나서 23일이 지나니 2살이 되었다. 뭔 이런 일이 있는가? 그러니 나이에 비해 말이 늦을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집에서 불가사의로 생각하는 게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투표를 통해 반장으로 뽑혔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부산에서 마산으로 전학 온지 1년 되어서. 여하튼 투표로 뽑힌 반장, 부반장, 분단장이 모두 교실 앞에 나갔다.

선생님이 반장부터 소감을 말해보자고 했는데 나는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했던 선생님은 부반장 먼저 하라 그랬고, 이후 나보고 하랬는데 또 묵묵부답. 결국 분단장까지 모두 소감을 말한 뒤에도 나는 입을 꾹 닫고 있다가 소감을 말하지 않고 내 자리로 돌아갔다.

실제로 나는 말보다 글이 편하다. 한 친구는 말이 조리 있어서 말을 하면서 녹음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글을 쓴다고 한다. ‘구라’가 센 사람들은 말하는 걸 녹음해서 이를 글로 옮기기도 한다.

나는 정반대다. 생각을 하고 있지만 막상 말을 하면 같은 단어를 반복하거나 말이 조리 있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별 생각이 없다가도 컴퓨터 자판에 손을 올리면 뭐든 글이 써진다. 손가락에 뇌가 있는지 신기하다. 기자가 뭘 물어보면 전화로 말을 해주는 것보다 핸드폰 문자로 보내면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초등학교 반장 선출 소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들려 준 이야기가 있다. 일본 최고의 웅변가 이야기다.

그 웅변가가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전교생을 앞에 두고 웅변을 하게 되었다. 옛날로 치면 운동장에서 아침 조회할 때 웅변을 한 것이다. 조회 단상에 올라가서 아래로 보이는 학생들을 쭉 둘러 보면서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 하면서 호기롭게 처음을 시작했다.

그러자 밑에서 급우와 선배들이 ‘저놈 제법인데!’ 등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순간 원고지는 하얗게 변해서 한 글자도 보이지 않고 그냥 단상에 얼어서 오줌을 싸버렸다. 급기야 선생님이 뛰어 올라와 애를 안고 내려갔다. 초등학교 때 그런 창피를 당한 그 애가 일본 최고의 웅변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평생토록 이 이야기를 잊은 적이 없다.

나는 40대에 채권 운용을 하면서 채권 관련 칼럼을 쓰기 시작해서 이후 지금까지 신문에 이런 저런 칼럼을 쓰고 있다. 강의는 가끔 했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마 4~5년 전이었을 것이다. 10여년 전에 처음으로 겁도 없이(나는 사전 정보 탐색 없이 임하다 보니 가끔씩 무엇도 모르고 할 때가 있다) KBS 아침 마당에 나가게 되었다. 이금희 씨가 진행할 때였다.

딴에는 50분 동안 전혀 실수하지 않고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마치고 나자 PD가 ‘사투리를 좀 쓰시네요, 뭐 괜찮은데 혹시 다음에는 끝말을 좀 똑똑하게 발음하면 좋을 겁니다’라는 말을 해줬다. 최근에는 같은 주제의 강의를 30번씩 할 정도로 강의 횟수가 많아지다 보니 말을 하는 게 나아진 것 같다. 양에서 질로의 전환이라고 할까? 그래도 강의 전에는 여전히 긴장된다.

이런 내게 위안을 주는 사람이 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다. 대단한 율법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예수를 박해하다가 나중에는 예수를 알리러 전도 여행을 떠난 사람이다. 뛰어난 학자였기에 글을 잘 썼다.

하지만 바울은 말이 서툴렀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바울의 외모는 키가 작고, 머리가 벗겨지고, 다리가 휘어지고, 미간이 좁고, 코가 긴 편이었다고 한다. 호감 있는 얼굴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도를 위해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려면 외모도 중요할 텐데 그런 면에서는 마이너스였다. 글을 잘 쓰는 반면 말이 서툰 바울이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다니며 사람들에게 말을 통해 전도를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된 업으로 삼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형님은 상대(商大)를 가려 했지만 당시 장남이 그렇듯이 의대를 목표로 했다. 그런데 여러 운명의 순간들이 겹치면서 공학을 전공하여 교수를 하게 되었다. 내가 봐도 상대를 갔으면 잘 맞았을 것 같다.

반면 나는 이과가 맞는 거 같은 데 경제학을 전공하고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이런 게 아이러니이면서 삶의 묘미이기도 하다.

인생 후반에 들어서 어떤 일을 할지, 혹은 어떤 일이 맞을 지 고민을 한다. 퇴직 후 친구들이 의외의 일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를 보노라면 그 일에 대한 재능보다는 거기에 우직하게 쏟은 시간과 노력이 중요한 것 같다.

요즘 어머니에게 ‘제 강의가 인기가 좋습니다’라고 하면, ‘아마 실력이 있어서 그럴 거다’라고 하신다. 절대 내가 말을 잘해서 그렇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 인생 후반의 일은 재능과 적성보다 우리의 우직한 노력과 집중이 좌우하지 않나 싶다.

bstar@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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