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엄마 간병에 모진말 하던 날…‘K장녀’의 복잡한 마음

한겨레 2023. 6. 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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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소소의 간병일기][한겨레S] 소소의 간병일기ㅣ장녀의 돌봄
일러스트레이션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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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남편이 인터넷에서 도는 이미지 한장을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보내왔다. 그러곤 한마디 덧붙였다. “누군가 생각나서.”

이미지 속엔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장녀 건들지 마. 눈빛이 차분하다고 얌전한 게 아니라 차분하게 돌아 있는 것뿐이야. 건들지 마. 경고했어. 크레이지 아시안 걸 중에 제일 크레이지는 장녀야.”

차분하다는 말도 미친 것 같다는 말도 많이 들으니 내 이야기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크레이지 걸’ 중에 최상급이라고 하니 기분이 나쁜 것 같지도 않았다. “이게 나라는 거야?” 농으로 따져 물으니 남편의 답은 “엔시엔디(NCND·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음)”였다.

초등학교 때, 나는 새 학년이 되는 게 싫었다. 담임선생님은 조례 때나 종례 때 공개적으로 형제가 몇인지를 조사했기 때문이다. “외동인 사람 손 들어.” “둘인 사람?” “셋인 사람?” 여기까지 손을 들지 못한 나는 제발 빌었다. 선생님이 더는 묻지 않길, 그래서 내가 호명되는 일은 없길, 낯설디 낯선 반 친구들 앞에서 내가 주목받지 않길, 그리고 무엇보다 형제가 많은 게 들키지 않길. 그런 요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넷인 사람?”이라는 질문에 마지못해 혼자 손을 들었다.

딸딸딸아들…동생한테 엄마이고 아빠

나는 이른바 ‘케이(K)-장녀’다. ‘딸딸딸아들’ 중에 ‘첫딸’, 예로부터 살림 밑천이라는 그 ‘첫딸’이다. ‘살림 밑천’이라는 말이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하던 때 딸 낳은 부모에게 하는 위로였다는 걸 알고 나선 꽤 기분이 상했다.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딸딸딸아들’ 중 첫딸이라고 하면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상대가 누구든, 내가 별다른 이야길 하지 않아도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아~” 했다. 그 “아~”라는 반응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아들을 낳기 위해 어쩌다 태어난 존재가 된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대한민국에서 맏이는, 그것도 장녀는 부모에게 많은 것을 요구받는다. ‘맏이’로서 모범을 보일 것, ‘장남’처럼 듬직할 것, ‘어머니’처럼 동생을 돌볼 것 등 다층적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들 앞에서 울어본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때 소설 <가시고기>를 읽을 때 방에서 문을 닫은 채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아들의 골수이식 수술비를 벌기 위해 신장을 팔려다 간암 말기 환자인 걸 알게 된 아버지가 각막을 판다는 눈물 쏙 빼는 내용이었다. 아빠한테 억울한 일로 혼날 때도 동생들 앞에선 절대 울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세수하거나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몰래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여튼 그랬다. 엄마 아빠한테 초등학생 때부터 들은 “네가 모범을 보여야 돼” “엄마 아빠가 없으면 네가 동생들한테 엄마이고 아빠야”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동생들을 잘 돌보고 챙기려면,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없으면 엄마이고 아빠이니까.

마흔살이 되어 엄마 아빠도 없을 수 있는 상황에 놓이고 난 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려 애썼다. 부모 간병으로 형제 사이가 틀어졌다는 이야기를 뉴스에서 익히 들은 탓이다. 4남매의 구심점을 잡지 않는다면 우리도 흩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무리해서 엄마 집을 찾고, 필요한 비용은 가장 많이 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엄마에게 잔소리하는 일이었다. 우리 4남매가 엄마 집에 가지 않은 날이 주 7일 동안 단 하루도 없고 우리가 식사를 준비해 냉장고에 넣어두는데도, 심신이 약해진 엄마는 종종 서운한 기색을 비쳤다. “그 (환자) 집은 자식들이 다 알아서 해주나 봐” “권사님 딸은 저녁에 권사님 집에 와서 자고 갔다고 하더라”는 엄마의 내심을 들으면 맥이 탁 풀렸다.

상태 호전 ‘희소식’…엄마의 수술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걸까. 주변에 항암 중인 부모를 둔 지인이나 동료를 보더라도 우리 4남매만큼 자주 찾는 사람은 없는데. 그분들은 스스로 식사도 챙기고, 집 청소도 하고, 병원도 가시는데….

“엄마, 그렇게 말하면 나 너무 서운해. 우리가 하루라도 엄마 혼자 있게 한 날 있어? 없잖아. 장기전인데 엄마도 도와줘야 우리도 덜 힘들어. 집 청소나 반찬 같은 건 우리가 다 하잖아. 대신 냉장고에서 식사 챙겨 먹는 것처럼 혼자 할 수 있는 건 엄마도 해야 해. 그리고 환자도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힘이 생긴대.”

의지하는 ‘큰딸’에게 하는 투정을 그저 받아줄 법도 한데, 나는 심사가 뒤틀린 사람처럼 기어이 ‘나도 힘들다’는 모진 말을 내뱉고 말았다. 딸들의 돌봄을 받는 ‘을’의 입장인 엄마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그런 뜻 아니야. 너희한텐 그저 고맙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친구를 붙잡고 울었다. 엄마를 돌보면서 ‘갑질’을 했다는 자책과 그 말의 절반은 진심이었다는 후회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생들만 있는 단체대화방엔 건조하게 글을 올릴 뿐이었다. “엄마한테 말했어. ‘엄마 서운할 수도 있는데, 엄마가 혼자 할 수 있는 건 해야 한다’고.”

항암 3회차에 접어들면서 엄마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살도 다시 조금씩 붙었고, 얼굴 부기도 많이 빠졌다. 식사 때 구토 증상도 거의 사라졌다. 무엇보다 걸음걸이에 힘이 생겼다. 아파트단지를 4~5번은 거뜬히 돌았다. 오히려 같이 걷는 내가 “좀 쉴까?”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암 발병 석달째, 우리는 희소식을 들었다. 주치의는 평소와 달리 흥분한 목소리로 “너무너무 좋아졌어요”라고 말했다. 처음으로 컴퓨터 모니터를 우리 쪽으로 돌려 보여주며 설명했다. “암세포 수치를 보는 카파 람다 수치가 이전엔 9630이었는데, 이번 검사에선 12로 정상 범위 안에 들어왔어요. 이대로면 항암을 4차까지만 하고 조혈모세포 이식을 할 수 있겠어요.” 갑작스러운 소식에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그 두달 뒤 나는 결국 동생뿐 아니라 조카 앞에서까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삭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으려 입원하기 전, 엄마는 병원 내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밀었다. 엄마의 머리카락은 ‘위잉~’ 소리와 함께 바리캉에 밀려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무심한 듯한 직원의 손놀림이 몇 차례 지나자 엄마의 매끈한 두상이 드러났다. 이 모습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담던 나는 미용실을 나와 주저앉았다. 거울 속 엄마가 눈을 감은 채 울고 있었다.

소소

갑작스레 ‘엄마 돌봄’을 하게 된 케이(K)-장녀가 고령화사회에서 청년이 겪는 부모 돌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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