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에게서 살아난 뒤 알게 된 진실 “사람도 먹이다” [여여한 독서]
발 플럼우드 지음, 김지은 옮김,
yeondoo 펴냄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무게를 나는 사파리 버스를 타보고야 알았다. 호랑이가 다가오더니 한껏 입을 벌렸다. 세상에, 호랑이에게 나는 한 입 거리구나. 버스 안에서 웃고 있는 게 한심하게 여겨졌다. 호랑이한테 물리면 나는 정신을 차리긴커녕 그대로 숨이 넘어갈 위인이다. 이런 주제이기에 나는 호랑이 앞에서도 끄떡 않는 사람을 존경한다. 일테면 〈악어의 눈〉을 쓴 발 플럼우드 같은 사람.
오스트레일리아의 페미니스트 생태철학자 발 플럼우드는 마흔여섯 살 때 혼자 카누를 타다가 악어의 공격을 받았다. 악어는 먹이를 입에 물고 살이 뜯겨 나가도록 물속에서 회전시키는데, 플럼우드는 세 번째 소용돌이 이후 가까스로 악어의 턱에서 빠져나왔고 끔찍한 부상을 입은 채 몇 시간 동안 늪지대를 기어다닌 끝에 구조되었다. 그리고 보통 사람이라면 두 번 다시 떠올리기도 싫을 경험을 십수 년간 숙고하며 자신이 본 ‘악어의 눈’으로부터 근대 휴머니즘 철학을 뒤엎는 새로운 생태철학을 전개해나갔다. 악어에게서 살아난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그 일을 곱씹으며 거기서 삶을 일신할 새로운 철학을 구성하다니, 놀람과 호기심에 책을 펼쳤다. 상상을 넘는 삶과 그 삶에서 길어 올린 깊디깊은 철학을 만났다.
나라면 트라우마였을 사건을 플럼우드는 ‘진실의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환영에 사로잡혔던 이전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진실에 눈을 떴다고 말한다. 어떤 진실인가? 사람도 먹이라는 진실이다. 익히 아는 사실이라고? 맞다. 인간은 동물이고 저보다 강한 동물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건 상식이니까. 하지만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을 위협한 동물은 죽이는 걸 당연시한다. 그저 사람 사는 마을에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도 멧돼지나 곰 같은 동물을 죽인다(그 결과 전 세계 포유류 중 야생동물은 4%에 불과하며, 인간은 34%, 가축은 62%를 점한다). 사람을 해쳤어도 죽이지 않는 건 주인이 있는 개뿐인데, 인간의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먹이’동물과 ‘애완’동물을 나누는 모순
플럼우드는 악어에게 물린 순간 이런 인간 중심적 세계가 허상임을 깨닫는다. 인간은 여느 짐승과 다른 우월적 존재가 아니라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먹이이며, “다른 존재의 죽음을 살아가고 다른 존재의 생명으로 죽는” “먹이사슬의 우주”를 살고 있음을 통감한다. 그리고 이 “가혹하고 생소한 평행우주”에서는 인간이나 쥐나 모두가 먹이이자 포식자로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이 평등함은 모든 존재가 영혼 없는 물질-육신이라는, 즉 다 같은 먹잇감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영혼 없는 물질이란 없기 때문이다.
플럼우드는 영혼과 육신을 나누고 인간과 자연을 대립시키는 근대적 이분법에 반대한다. “본질적 자아는 육신을 떠난 영혼”이고 죽음은 육신의 끝이자 영혼의 영속이라 보는 서구 사상은, 인간 존재를 지구로부터 소외시킬 뿐 아니라 자아의 연속성을 이야기하지도 못한다고 비판한다. 대신 그는 모든 생명이 순환하고 소통하는 애니미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오래됐지만 낯선 세계관에서 “모든 생명체는 먹이이고 동시에 먹이 그 이상”이다. 죽음은 재생이니, “생명의 기원을 이루는 선조 공동체와 생태 공동체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플럼우드는 “인간을 지구공동체의 맥락에서 다시 상상하라”고 촉구하는데, 이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먹으면서 먹히고 죽지만 죽지 않는다.
그는 먹이가 됐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모든 먹이가 영혼”임을 분명히 하며, 따라서 ‘영혼 없는 먹이’만 먹을 수 있다는 일부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은 근대의 이분법을 반복, 강화하는 또 다른 제국주의라고 통박한다. 플럼우드는 죽어가는 야생 웜뱃을 자식처럼 거뒀지만 그를 자신의 “특권적 반려동물”로 키우지 않았으며,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했지만 이는 육식 문화가 아니라 동물을 상품으로 환원하는 자본주의 문화에 반대해서였다.
영화 〈꼬마 돼지 베이브〉에 관한 에세이에서 그는 ‘먹이’동물과 ‘애완’동물을 나누는 이분법, 동물들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 인간 사회의 관습적 계약이 가진 모순을 지적한다. “다른 동물을 고기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 늑대(개)에게 그들 몫의 고기를 주고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 역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그는 인간의 특권을 (반려)동물에게 확장하려는 동물보호운동이나 윤리적 사고를 비인간 영역에 적용하지 않으려는 생태운동 둘 다 ‘인간/자연’의 이분법에 갇혀 있다고 비판한다.
생애 말년에 쓴 에세이에서 그는 포식을 악마화하는 존재론적 완전채식주의나, ‘남성-사냥/여성-채집’을 분리해 후자를 상찬하는 젠더 인류학에 반대하면서, 육식에 대안이 있다는 주장은 서구적 보편주의의 산물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원주민 문화에서 볼 수 있듯이, 먹이는 시장이 아니라 생태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책을 덮을 즈음, 양애경의 ‘귀’라는 시를 읽었다. “(…)고속도로에서 마주친/ 거대한 가축 수송차량 안// 비죽 솟은/ 돼지의/ 순하디순한/ 분홍색 귀//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말하고 말았다// -내가/ 너를 먹고 살아야 하는 거니?” 플럼우드라면 이 물음에 뭐라고 답했을까? 네, 먹고 살아요. 내 혀가 아니라 내 심장이 필요로 할 때, 오직 그때만 우리가 친족 관계라는 걸 인정하면서 그 분홍 살을 먹어요. 그리고 내 안에 들어온 분홍색 귀로 잘 듣고, 잘 살다 잘 죽어야 해요. 이 세계의 과거와 미래가 지금 내 안에 있으니까요,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제 나는 이 담대한 사람이 가르쳐준 마음으로, 소중한 살을 먹고 내 소중한 살을 아낌없이 내어줄 때까지, 겸허히 살기로 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그래서 아름다우니, 용감하진 못해도 욕심 부리지 않고 사는 보람은 충분하리라.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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