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신 넘어 망국 자초한 ‘최전선의 똥별’들[책과 삶]

최민지 기자 2023. 6. 3.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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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야망·공명심 등에 취해
‘멍청하고 부지런’했던
12명의 세계적 패장
역지사지로 본 리더십
무다구치 렌야(왼쪽에서 두번째)는 전선에 기자들을 대동하고 다니며 신문 1면을 장식하기를 즐겼다. 덕분에 당시 일본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의 눈에 들어 출세를 거듭하다 버마 주둔 제15군 사령관에 임명됐다. 그러나 공명심에 무리하게 작전을 밀어붙이면서 최악의 졸전인 ‘임팔 작전’의 주인공이 됐다. 교유서가 제공

별들의 흑역사

권성욱 지음 | 교유서가 | 576쪽 | 2만9800원

상사의 종류를 흔히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 타입)’ ‘똑게(똑똑하고 게으른 타입)’ ‘멍부(멍청하고 부지런한 타입)’ ‘멍게(멍청하고 게으른 타입)’ 네 가지로 나누곤 한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 이 분류는 의외로 그 역사가 길다. 1933년 10월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공화국군의 수장이었던 쿠르트 폰하머슈타인-에쿠오르트 장군(1878~1943)은 독일군 부대지휘교본을 발표했다. 히틀러와 나치 체제에 단호히 반대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이 교본에서 ‘네 가지 유형의 장교’를 소개한 뒤 이렇게 설명했다.

“현명함과 게으름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면 최고의 지도자를 맡을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정신력과 배짱이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주의해야 할 사람은 멍청하면서 부지런함을 갖춘 자다. 그는 무엇을 하건 간에 조직에 해를 끼칠 뿐이므로 어떤 책무도 맡아서는 안 된다.”

어느 조직에서나 좋은 리더는 중요하지만 군대에서라면 그 중요성은 한층 커진다. 리더의 결정에 따라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능한 ‘똑게’만을 요직에 앉힌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인가. 만일 그랬다면 현재 세계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1942년 7월 남부 러시아 전선에서 소련군 소속의 한 젊은 정치장교가 병사들에게 돌격을 명령하고 있다. 군의 정치장교는 병사들이 국가에 대해 충성심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주 임무다. 사진이 찍히고 몇 분 뒤 그는 전사했다. 교유서가 제공

<별들의 흑역사>는 세계의 무능한 패장 12명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이순신처럼 극적인 승리를 거둔 전쟁 영웅을 다루는 대부분 전쟁사 서적과 달리 이 책은 패자에 주목한다. 책을 쓴 전쟁사 연구가 권성욱은 “대부분 패자는 승자를 빛내기 위한 역사의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며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주목해야 할 이는 패자들이다. (중략) 실패에서 교훈을 얻음으로써 진정한 승리를 하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일본군 최악의 졸전 ‘임팔 작전’을 이끈 무다구치 렌야는 패장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엘리트인 그는 언제나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었다. 언론에 나서길 좋아했고, 다치지도 않은 팔에 붕대를 감고 나타나 신문 1면을 장식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정작 나서야 할 때에는 온갖 핑계를 대며 작전을 무산시켰다. 그는 전쟁터를 휴양지로 이용하기도 했다. 거대한 산맥과 울창한 원시림으로 둘러싸여 적들에게 ‘잊혀진’ 버마 중부 메이묘에 자리잡고는 유곽을 만들어 기생들과 술을 마셨다.

무다구치의 운명이 바뀐 것은 1943년. 인도의 독립운동가 수바스 찬드라 보스가 일본을 찾아 인도 독립 지원을 요구하면서였다. 당시 도조 히데키 일본 총리는 그의 손을 잡았다. 연합군을 몰아내고 인도 대륙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본 것이다. 신선놀음을 하던 무다구치는 이 소식에 눈이 반짝였다. 도조 히데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울창한 정글에 병력을 투입할 수 없다는 과거 논리는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 있었다.

무다구치는 1944년 3월 버마와 인도 국경에 위치한 임팔로 10만명의 병력을 보냈다. 자신은 전선에서 400㎞ 떨어진 메이묘에 남아 기생들 품에 안겨 있었다. 그사이 무거운 짐을 들고 정글 속으로 들어간 일본군은 대패했다. 약 4개월간 이어진 전투에서 10만명 가까운 병사 중 1만2000여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영국군 사상자는 약 1만7000명이었다. 그의 패배는 일본군의 사기와 전력을 떨어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의 누리꾼들이 그를 ‘한국의 숨겨진 독립유공자’라는 별명을 붙인 까닭이다.

무다구치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일흔일곱 살 나이로 눈을 감는 순간에도 ‘임팔 작전의 실패는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팸플릿을 만들어 조문객들에게 나눠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1942년 4월19일 버마 메이묘에서 장제스 부부와 미군 사령관인 조지프 스틸웰(오른쪽)이 환하게 웃고 있다.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스틸웰은 장제스의 최정예부대를 넘겨받아 버마에서 일본군과 싸우지만 수차례 오판을 하며 중국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교유서가 제공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유재흥(왼쪽)과 신상철 장군이 평양에 입성하고 있다. 치열한 전투 끝에 38선을 넘었지만 기쁨도 잠시 중국군이 개입하며 전세는 곧 바뀌었다. 이듬해 유재흥은 한국 전쟁 역사상 가장 큰 패전인 ‘현리 전투’를 이끌게 된다. 교유서가 제공

저자는 무다구치를 비롯해 제1·2차 세계대전 당시 무능의 극치를 보여준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한다.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의 정치 군인이었던 로돌포 그라치아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장제스의 최정예 부대를 넘겨받아 일본군과 싸우던 중 무리한 작전을 강행해 중국을 위기에 몰아넣은 미국 군인 조지프 스틸웰, 처세술 하나로 무솔리니의 충견이 되어 나라와 군대를 위기로 몰아넣은 피에트로 바돌리오 등의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유일한 한국인 패장으로 한국 전쟁 역사상 가장 큰 패전이자 미국에 전시작전권을 빼앗기는 빌미가 된 ‘현리 전투’ 주인공인 유재흥의 사례도 등장한다.

울산 동구청 소속 공무원이면서 온라인 군사 카페·블로그에서 활동하는 ‘밀덕’(밀리터리 마니아)인 저자는 그동안 전쟁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패장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쳐낸다. 그는 패장들의 공통점으로 권위적이고 아집이 강하며 새로운 방식보다 기존의 낡은 방식을 고수해 군의 변화와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짚는다. “진정한 명장의 자질이란 남들보다 특출한 천재성이 아니라 자신의 두 어깨에 놓인 책임의 무게를 얼마나 깨닫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

별들의 흑역사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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