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발견한 아내의 누드사진···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가 찍었다?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6. 3.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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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24] “이 사진...도대체 뭐야?”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서랍에서 그녀의 나체사진이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진 속 얼굴을 보아하니 먼 과거의 일이 아닌 최근의 사진. 남편인 그는 당연히 찍어 준 적이 없었지요. 그녀는 꽤나 능숙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음모(陰毛)를 훤히 드러내고도 의연한 표정이었으니까요. 분명 한 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습니다. 촬영 이후 사진작가와 잠자리를 했을 거라는 생각까지 미치자, 남편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지요.

19세기 프랑스에서 문인으로 성공한 마리 드 레니에.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외면하고 싶었지만, 진실을 그는 알아야 했습니다. 외출을 나가는 아내의 뒤를 몰래 밟기로 결정했지요. 경쾌한 발걸음의 그녀. 그놈의 집으로 향하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익숙한 집의 문을 두들깁니다. 한 남자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게 웬걸요. 그 남자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19세기 프랑스 문인인 마리 드 르니에의 불륜 이야기를 다룬 영화 ‘큐리오사’.
환한 표정의 그는 그녀와 포옹을 나눕니다. 그리고 집에 함께 들어갑니다. 둘의 표정은 너무나 밝았습니다. 마치 오랜 연인인 것처럼요. 프랑스 문단을 뒤흔든 마리 드 레니에와 피에르 루이스의 불륜 이야기입니다. 오쟁이 진 남편의 이름은 앙리 드 레니에. 세 사람 모두 20세기 말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학인이었습니다.
‘금녀의 영역‘에서 재능을 발휘한 마리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운 여자 마리 드 레니에의 이야기부터 들어봅니다. 마리는 유명한 시인 호세 데 에레디아의 딸이었습니다. 1875년 12월 파리에서 태어난 마리는 내로라하는 예술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를 보며 자랐지요. 아버지인 호세 역시 생각이 열려 있는 사람이었기에, 딸 마리가 ‘당당한 여성’으로서 자라기를 바랐습니다.

마리는 세상에 순응하지 않은 여성이었습니다. 금녀의 영역이던 프랑스 문학계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기도 했었지요. 물론 자신이 여성이라는 걸 밝히지 않은 채였지만, 그녀는 “여자도 남자만큼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고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그를 언제나 응원했습니다.

문학소녀에게 사랑이 찾아옵니다. 시인 피에르 루이스였습니다. 바람기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이었지만, 유머와 재치로 무장한 덕분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운명은 얄궂게도 그와의 사랑을 방해했습니다. 집안에서 그녀의 결혼 상대로 피에르의 절친인 앙리 드 레니에를 점찍어서 였습니다.

“마리, 나도 꽤 괜찮은 남자라오.” 앙리 드 르니에는 재력을 앞세워 마리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쿠바 출신인 아버지 호세가 1868년 쿠바 봉기로 재산을 모두 잃어 재정상황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앙리는 마리의 집안을 구해줄 재력이 있었지요. 마리는 피에르를 더 사랑했지만, 집안은 그녀의 마음을 고려할 수 없었습니다.
결혼 이후에도...삼각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피에르 미안하네. 나도 마리를 사랑하네.”

피에르에게 절친 앙리로부터 서신이 도착합니다. 마리와 앙리가 약혼을 올린다는 내용입니다. 1895년의 일입니다. 피에르에게 파리는 배신의 도시로 각인됩니다. 새로운 공기가 필요한 시기, 그는 훌쩍 알제리로 떠나버립니다. 마리는 그가 프랑스를 떠난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피에르가 보고 싶어요.” 마리는 결혼 이후에도 남편 앙리보다는 피에르를 더 사랑했다. 영화 ‘큐리오사’의 한 장면.
“피에르가 돌아왔다고 하더군.”

무료한 결혼 생활이 지속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피에르의 귀국 소식을 남편 앙리로부터 듣습니다. 마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립니다. 결혼 생활 2년, 그녀는 전혀 행복감을 못 느낀 터였습니다. 열정은 고사하고, 일말의 의리조차 남아있지 상황이었습니다. 그녀는 상상하곤 했습니다. “앙리의 자리에 피에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라고요. 그런데 그녀의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이었습니다.

‘남편과 애인 사이’. 왼쪽에 남편 앙리를 두고 피에르와 손을 포개고 있는 마리. 영화 ‘큐리오사’.
유부녀 마리, 피에르와 선을 넘다
무언가에 홀린 듯, 어느 집 앞에 섰습니다. 피에르의 거처였습니다. “똑똑”. “누구세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분명히 여성의 것이었습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관능적인 여성이 문을 엽니다. “피에르는 지금 바쁜데요.” 알제리에서 애인을 만들어 귀국한 것이었습니다. 바람둥이 기질은 어디가도 변하지 않았지요.마리는 애써 태연한 척 그녀를 무시하며 집 안으로 들어갑니다. 오랜 시간 그리워하던 피에르가 보였습니다. 알제리의 태양에 피부가 다소 그을린 걸 제외하면, 재치 있고 생기넘치던 그 모습 그대로였지요.
피에르는 알제리에서 데려온 여인과 난교를 즐기는 등 방탕한 인물이었다.
처음엔 대화만 하려던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계획과 달리 마리의 마음은 흔들렸지요. 그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가져다 대자 몸이 반응합니다. 결국 잠자리까지 이어졌지요. 앙리와는 처음부터 잘못된 결혼이었고, 이제야 모든 것이 원상복귀 된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피에르의 누드모델이 된 마리
“당신의 사진 모델이 되고 싶어요. 도덕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자세로.”

마리는 그의 정부가 되었습니다. 사진찍기가 취미인 그를 위해서 누드모델도 마다하지 않았지요. 나체사진도 여럿 찍었습니다. 관계하고, 찍고, 다시 관계하기를 여러 차례. 행복과 정열이 뒤섞여 땀방울로 맺혔습니다. 그가 다른 알제리의 여인을 비롯해 다른 여인들의 사진도 찍는다는 걸 알았지만, 마리는 별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행여 그가 떠날까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었지요.

남편 앙리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아내인 마리의 얼굴에 어느 날부터 묘한 행복감이 비쳤지는 걸 알아챘지요. 물론 그 행복의 근원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걸, 그는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집을 비운 사이 방 서랍에서 그녀의 누드사진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앙리는 왜 아내의 불륜을 용인했나
껍데기라도 잡고 싶은 남자의 헛된 욕심이었을까요. 이혼남이라는 비난이 두려워서였을까요. 앙리는 놀랍게도 두 사람의 관계를 용인합니다. 심지어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나왔을 때도 이를 받아들였지요.
마리와 그의 아들 ‘피에르’. 피에르의 법적 아버지는 앙리 드 레니에지만, 친부는 피에르 루이스였다.
아이의 성은 자신을 따라 레니에로 지었습니다. 이름은 피에르로 지었지요. 불륜남과 동명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태어난 이듬해인 1899년 앙리는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비테트상을 받았습니다. 바람맞은 분노를 영감삼아 문학으로 풀어낸 것이었을지.

마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방탕한 성생활은 역설적으로 문학적 자양분이 됐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L‘inconstant(의역하면 변덕쟁이랑 뜻.1903년 작품)이 대표작이었지요. 문학은 금녀의 영역이었기에 제라르 두빌이라는 가명을 썼지만, 작품의 인기는 선풍적이었지요. 1918년 프랑스 아카데미 문학상 1위를 수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 작가였습니다. 유명 작가 콜레트보다도 높은 순위에 있었던 글쟁이가 바로 마리였지요.

마리가 ‘제라르 두빌’ 이란 이름으로 출판한 책 ‘L’inconstante‘.
마리의 동생과 결혼한 피에르
마리와 피에르의 관계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1899년 피에르가 결혼을 결정합니다. 신부는 (경악스럽게도) 마리의 여동생 루이즈. 마리는 자신의 여동생을 불륜남과 결혼시키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었지요. 그녀는 피에르와 잠자리 후에 이야기합니다. “내 동생과 결혼하세요, 당신을 더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도록요.”
화가 자크 에밀 블랑쉬의 작업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마리 드 레니에.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피에르와 동생 루이즈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둘은 이혼했고, 피에르는 다른 사람과 재혼하면서입니다. 이때 마리와 피에르의 관계도 끝난 듯이 보입니다. 불륜남이자 난봉꾼인 피에르는 1925년 고독 속에서 죽어간 것으로 전해집니다. 폐기종이 원인이었습니다.

마리는 수 많은 남성들과 또 다시 염문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소설가 에드먼드 잘루, 이탈리아 귀족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극작가 앙리 번스타인 등 당대의 유명인들이 그녀의 불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지요. 여러 여성들과의 관계도 개의치 않았다고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역시 남편인 앙리는 묵인하고 있었지요.

“당신 도대체 몇 명과 바람 피울 작정인가” 앙리와 마리가 함께 찍은 사진. 둘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앙리는 마리와 피에르의 친아들을 자신의 자식으로 키우기도 했습니다. 아들 피에르는 친부의 피를 물려받은 덕분인지, 삽화가로서 제법 성공을 거뒀으나 경박스러운 성격에 파티와 술과 여자를 끼고 살았지요.
불륜, 동성애가 만연한 19세기 프랑스 예술계
현대의 시선으로도 경악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당시 문예사조를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닙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한 퇴폐주의와 상징주의 작품들이 그들의 삶과 닮았기 때문이지요.

당시에는 미(美) 그 자체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심미주의가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일종의 선언이었지요. 청교도적 근엄과 절제의 풍조에 반기를 들은 셈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기독교가 억압해 온 성을 해방하는 문학이 번성하게 된 것이었지요. 동성애자로 유명한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 역시 대표주자 중 하나였지요.

피에르는 여성 동성애를 묘사한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사진은 영국 화가 시메온 솔로몬 의 ‘미틸레네 정원에 있는 사포와 에린나.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다. 1864년작.
앙리와 마리, 피에르 세 사람 역시 상징주의 문학가로서 성적 자유를 강조하는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피에르 루이스는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묘사해 명성을 얻었지요. 고대 그리스 소녀의 동성애와 삶을 기록한 산문시 ’빌리티스의 노래‘(1894년)였습니다.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가 이 작품에 수록된 시를 피아노 곡으로 각색하기도 했었지요. 창녀 생활을 묘사한 ’아프로디테‘(1896년)는 35만부가 팔려나갔습니다. 마리와 앙리의 작품 역시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지요.
예술가와 윤리의 문제
세 사람의 관계를 보며 예술가와 윤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술가에게 윤리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라, 그들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대중의 생각은 좀 다르게 흘러가지요. “비윤리적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비하는 건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다”는 목소리입니다.
불륜의 경험을 소설로 소화해 명성을 얻은 2022년 노벨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 <EPA연합뉴스>
어려운 문제이지만, 평론의 세계에서는 전자가 우세합니다.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불륜 경험을 담은 소설로 명성을 얻어 노벨상을 받기도 했었지요. 그녀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는 집필의 원칙을 내세웁니다. 스웨덴한림원은 “개인적 기억의 집단적 구속을 발견한 용기와 예리함을 높이 평가한다”고 수상 배경을 설명했지요.
마리 드 레니에의 자유로운 사생활은 예술가와 윤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한 유명 영화 감독 역시 ‘불륜’의 멍에와는 별개로 해외 영화제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예술가의 사생활과 완전히 존중받아야 하는 것인지, 범인(凡人)인 저에겐 여전히 난해한 문제이지요. 그저 그들의 상상력을 날개 삼아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뎌볼 뿐입니다.

<네줄요약>

ㅇ19세기 프랑스 유명작가인 앙리와 마리, 피에르는 삼각관계였다.

ㅇ마리는 집안 사정으로 앙리와 결혼하지만, 이후 피에르와 불륜관계에 빠졌다. 피에르와 누드사진도 여럿 남겼다.

ㅇ마리는 여동생과 피에르를 결혼시켰다. 자연스럽게(?) 피에르와 만나고 싶어서였다. 헤어진 이후에도 여러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

ㅇ당대 프랑스 문예사조와 작가들의 삶은 ‘외설적’이라는 측면에서 닮아있다.

<참고문헌>

ㅇ피에르 루이스, 욕망의 모호한 대상, 불란서책방, 2021년

ㅇ루 주네, 영화 ‘큐리오사’,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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