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만주벌판 달리던 日 육사 출신 독립운동가, 조선인 밀고에 날개꺾이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3. 6. 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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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대한제국 무관학교 다니다 유학한 이종혁, 참의부 군사위원장으로 활약하다 옥고치른 뒤 타계
일본 육사 출신 독립운동가 이종혁의 타계를 알리는 조선일보 1935년12월 19일자 기사.

1935년 겨울 부고 기사 하나가 신문 사회면에 났다. ‘남북 만주로 달리든 이종혁 별세’(조선일보 1935년12월19일). 평북 선천의 한 여관에서 가족도 없이 임종을 맞았다는 부고 소식이었다. ‘지난 12월14일 오후5시반에 평북 선천읍 동일여관 쓸쓸한 방 한구석에서 이 세상을 길이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영원히 가버린 가석(可惜·몹시 아깝다는 뜻)한 인물이 하나 있으니 그는 지금으로부터 44년전 충남 당진에서 출생한 이종혁씨로 어려서 현해탄을 건너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이종혁(李種赫,1892~1935)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인 그는 1909년9월 학교가 폐교당하자 동료, 선배 41명과 함께 관비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유학을 떠난 인물이다. 도일(渡日) 당시만 하더라도 약소국 조선의 부국강병을 꿈꾸며 골간이 되려고 작심한 터였다. 그런데 지킬 나라가 없어졌다. 육사 예비과정인 도쿄 중앙유년학교 재학중이던 1910년8월 경술국치를 맞은 것이다. 집단 자퇴는 물론 집단 자결까지 거론하던 중, 이왕 군사 교육을 배우러 왔으니 배울 것은 다 배운 뒤 중위로 진급하는 날, 다 함께 군복을 벗고 조국 독립에 헌신하자고 뜻을 모았다.

이종혁은 1908년 11월25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지원해 선발됐다. 학교는 이듬해 9월 군부폐지와 함께 문을 닫았다. 무관학교가 있던 서울 신문로 1가 238 신문로빌딩 앞엔 표지석이 있다./김기철기자

◇선우휘 소설 ‘대인 마덕창’의 모델

1915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제27기)를 졸업한 이종혁은 엘리트 장교로서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었다. 일본군이 1918년 시베리아로 출병할 때 파견돼 상훈(賞勳)을 받기도 했다. 이종혁은 연해주 일대에 주둔할 때, 소련 스파이 혐의로 붙잡혀온 조선인을 심문하는 자리에 있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이었다. 이종혁은 “너는 어떻게 돼서 이런 북새판에 끼어들었느냐”라고 물었다. 이 조선인은 “당신은 어떻게 돼서 그런 왜놈 군관의 복장을 하구 이런데까지 와서 어정거리고 있는 거요?”라고 되물으며 이종혁을 쏘아보았다고 한다. 소설가 선우휘가 이종혁 친구였던 독립운동가 유봉영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1965년 발표한 소설 ‘대인 마덕창’에 나오는 얘기다.

이 항일운동가와의 만남이 이종혁의 진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월간 '현대문학' 1965년 5월호에 이종혁을 모델로 단편 '대인 마덕창'을 발표한 소설가 선우휘. 이종혁 지우인 유봉영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썼다.

◇중위 진급 후 만주로 망명

중위로 진급한 후 나고야에서 3.1운동 소식을 들었다. 그는 신병을 내세워 예비역으로 편입됐다. 1920년 전후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의 독립운동단체 참의부에 들어가기까지 이종혁의 행적은 모호하다. 군벌 마점산 부대의 교관으로 일했고, 장개석의 국민군에 가세한 풍옥상 군대의 참모로도 있었다고도 한다. 1925년초엔 참의부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먼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육사 선배 지청천, 유동열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종혁은 192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 육군 참의부 군사위원장에 오르면서 독립운동 일선을 지켰다. 하지만 1928년 9월17일 조선인 밀정의 밀고로 선양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다. 이종혁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당시 마덕창(馬德昌)이라는 가명을 썼다.(‘참의부 군사장 마덕창 피착’, 조선일보 1928년 11월8일)

◇지청천과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관여

참의부 군사위원장(1927년 3월) 취임 이전 시기 이종혁의 활동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게 많다. 마점산 부대 교관이나 풍옥상 군대 참모로 일하게 된 계기와 구체적 활동 내용도 불확실하다. 흥미로운 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1925년10월5일 일본 외무성에 보낸 비밀보고서(‘鮮匪團 正義府對 新民府 妥協進行 狀況에 關한 件’, 高警제3543호)다. 이종혁이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신민부 통합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보고한 내용이다. 정의부 군사위원장 지청천(일본 육사 26기)이 1925년9월5일 신민부와의 통합 협상대표로 하얼빈에 왔을 때 이종혁(마덕창으로 기재)과 만났고 이종혁은 신민부와의 교섭을 중개한 사람으로 설명했다. 둘은 무관학교 시절부터 일본 육사 졸업까지 함께 수학한 선후배인데다, 비슷한 시기 망명했기 때문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장개석 국민군에 참가

일본 제국의 첨병인 육군사관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이종혁의 재판은 신문들이 앞다퉈 보도했다. 조선일보만 해도 ‘참의부 군사장 이종혁 공판’(1929년2월7일), ‘참의부 군사장 원심대로 5년 언도’(1929년5월23일), ‘일본군으로 시베리아에 출전, 중국군으로 북벌에 가담’(조선일보 1929년10월8일) ‘통의군사장 이중위 奪位’(1929년 12월22일)처럼 속보를 쏟아냈다. 동아일보, 중외일보는 물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까지 이종혁 공판을 다룰 만큼, 당시로선 충격적 사건이었다.

신문은 공판 보도를 통해 이종혁의 활약을 소개했다. ‘일본군으로 시베리아에 출전, 중국군으로 북벌에 가담’ 기사는 장개석 국민군에 가담한 이종혁이 군벌 장작림 군대를 토벌하기 위한 전쟁에 뛰어들었다가 장작림 군대에 포로가 돼 고문을 당한 끝에 1927년 봄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뒤 독립군에 투신했다고 적었다. 이종혁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받은 상훈 덕분에 비교적 가벼운 징역 5년형을 받았다고 한다.

이종혁과 일본 육사 동기인 김석원이 남긴 회고록 ‘노병의 한’에는 이종혁이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면 석방시켜준다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다 만기출소했다고 적었다. 이종혁은 옥중에서 늑막염을 앓다가 쇠잔한 몸으로 1934년 4월 1일 평양에서 출소했다. 그의 만기 출옥을 알리는 기사는 ‘그는 고향에나 어디에나 일가 친척 한 사람도 없고 오직 혈혈단신으로 감옥에서 얻은 중병으로 방금 몹시 신고하고 있다 한다’(조선일보 1934년4월7일)로 마무리됐다. `

이종혁 재판 상황을 알리는 조선일보 1929년2월7일자 기사. 출세가 보장된 일본 육사 출신 엘리트 장교가 무장 독립투쟁 지도자로 활약하다 체포됐다는 소식은 당시 언론에서 크게 다룰 만큼 주목을 받았다.

◇이종혁 돌본 독립운동가 유봉영

병약한 몸으로 출소한 이종혁을 돌본 이가 독립운동가 유봉영(1897~1985)이었다. 이종혁은 평양 감옥에서 출감한 당일인 1934년4월1일 밤 경성역에 도착했다.역까지 마중나가 이종혁을 맞은 사람이 유봉영이었다. ‘저녁 후 8시반 경 역으로 나가 9시25분 도착 기차로 온 이종혁 군을 만나 같이 이문식당으로 해서 집으로 오다.이군은 오늘 평양 형무소로부터 출감하였다. 이군과 지난 이야기를 하노라고 오전 1시 지나 취침하였다.’ 유봉영은 4월1일자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종혁의 석방 소식을 신문사에 알린 이도 유봉영이었다. 유봉영은 4월 6일 오후 조선일보사에 들러 홍종인(1903~1998)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에게 이종혁 근황을 얘기했다. 같은 날 일기엔 ‘종혁군의 기사가 동아, 조선 양지(兩紙)에 기재되다’라고 썼다.

김석원 회고록 ‘노병의 한’에는 어느 날 유봉영이 집으로 찾아와 이종혁을 아느냐고 물어, 그를 따라 이종혁을 위문하러 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김석원은 일제말 일본군 대좌까지 진급했다.

‘생각하면 한국무관학교 시절부터 일본 육사까지 만 8년 동안이나 한솥의 밥을 먹으며 책상을 나란히 하고 공부를 같이 한 이종혁과 나 사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한쪽은 우리 나라의 해방을 위해 독립투쟁을 하는 독립군 장교요, 또 한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가로막는 일본군의 장교였다. 묘한 사이였다. 따져보면 극과 극의 사이랄까.’ ‘우선 이종혁을 바로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심한 늑막염으로 병색이 말이 아닌 이종혁이었지만 도리어 그가 당당한 인간처럼 보였고 나 자신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보였다.’

김석원은 문병을 마친 뒤, 지인들의 후원을 얻어 치료비로 약 500원을 지원하기도 했다고 썼다. 웬만한 월급쟁이 연봉에 맞먹는 거액이었다. 그리고 친척 동생이 하던 종로 전동여관에 거처를 마련해줘 이종혁은 몇달간 이곳에 머물렀다. 광복이 한참 지난 시점에 출간된 회고록이라 기억을 미화하거나 윤색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김석원이 이종혁을 도운 것만은 분명하다. 유봉영 일기에도 그해 5월4일 김석원 주선으로 전동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는 내용이 있다.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유해

이종혁은 경성에서 유봉영의 도움으로 몸을 추스르다 평북 선천으로 옮겨 요양했으나 결국 출소 1년 8개월여만에 타계했다. 쓸쓸한 죽음이었다. 이종혁은 선천에 묻혔다. 이듬해 4월 신문에 이종혁 유해를 고향인 충남 당진 선영으로 옮기려 하나 가세가 빈궁해 사회의 지원을 바란다는 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이장은 실현되지 못했다. 김석원이 몇 년 후 선천에 강연갔다가 친구 이종혁의 무덤을 찾았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김석원은 ‘무명순국열사’의 무덤이란 묘비만 달랑 있는 무덤에 주저앉아 한참 울었다고 한다.

이종혁은 1980년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국가유공자를 관리하는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는 이종혁이 1941년 병사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생몰년대 정도는 제대로 확인해서 바로잡는 게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선열에 대한 후손의 예의가 아닌가 싶다. 다가오는 현충일을 맞아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참고자료

일본 외무성, ‘鮮匪團 正義府對 新民府 妥協進行 狀況에 關한 件’, 高警제3543호

유봉영 일기(미공개), 1934년, 1935년

선우휘, 대인 마덕창, 현대문학 125, 1965년5월, ‘신한국문학전집’ 24 재수록, 어문각,1974

김석원, 노병(老兵)의 한(恨), 육법사, 1977

이기동, 비극의 군인들,일조각,2020

김주용, 제국주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李種赫의 생애와 활동 : 굴종, 협력, 저항의 인생사, 동국사학7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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