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언의 책과 사람들] ‘아리랑’의 주인규, 비료공장에 위장 취업하다
[서울=뉴시스] 해방기 영화 운동에 관해 석사논문을 쓸 무렵이었다. 이 시기 북한 지역에서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 이러저러한 자료를 찾는 중 한 인물에 꽂혔다. 바로 북한 영화의 탄생을 진두지휘했던 영화배우 주인규였다.
주인규는 나운규나 윤봉춘, 이경손처럼 그 시대를 살았던 다른 영화인들에 비해 다소 낯선 이름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에 관한 내용은 지극히 소략하다. 심지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리랑’에 출연한 유명 배우라는 데 그가 출연한 영화는 물론 스틸까지 남아 있지 않아 얼굴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우리에게는 철저하게 잊힌 존재이지만 한때 북한 영화계의 최고 위치에 있었던 주인규에게 흥미 이상의 관심이 생긴 것은 그의 이력을 하나씩 알아가면서부터였다. 오래된 신문과 잡지에서 주인규라는 이름을 발견할 때마다 상상치 못한 다양한 삶의 이력이 튀어나왔고, 어느새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리랑’의 대단한 성공으로 이름을 알린 주인규는 고향인 함흥에 들어선 조선질소비료회사에 위장 취업했다. 1929년 일어났던 원산총파업을 응원하기 위해 원산에서 위문공연을 한 것이 계기였다. 죽음의 공장으로 악명 높은 조선질소비료회사에서 그는 노조를 조직하고 파업을 선동하다 해직되었다. 해직된 후에도 코민테른 산하 태평양노동조합 일을 맡아하였고 고향 함흥에서 해직된 노동자가 주인공이 된 영화 ‘딱한 사람들’을 만들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노조를 조직하기 위해 위장 취업을 해서 활동했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었지만 무려 1920년대, 당대 가장 유명한 영화배우가 공장에 위장 취업해서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영화에나 나올법한 일이었다.
주인규의 흔적은 다소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김종욱 편 ‘한국영화총서’, 김종원 편 ‘한국영화감독사전’ 등을 낸 펴낸 국학자료원에 책 출간을 의뢰하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 책장에서 영인본으로 나온 ‘태평양노동자’라는 자료집을 발견했다. 주인규가 자신의 집 뜰에 지하실을 파고 그 안에 인쇄기를 들여놓고 비밀리에 제작했던 문건들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를 수집해 영인본으로 발간한 연구자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자료집 ‘태평양노동자’를 펴낸 박환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독립운동사에 천착해 귀중한 연구 성과를 발표해 온 선생을 페이스북으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뵙게 된 것은 내가 천안에 노마만리라는 책방을 낸 것이 계기였다. 선생은 독립기념관에 회의가 있을 때마다 이곳 노마만리에 들러 주었다. 그간 선생이 해온 학술활동이 여러 가지 이유로 독립운동사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중요한 인물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내가 한국영화사에 잊힌 인물 주인규에 주목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그래서인지 알게 된 지는 오래되지 않지만 누구보다 친근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 박환 선생이 근간 ‘한국독립운동사의 반성과 과제’(국학자료원, 2023)를 직접 가져다줘 흥미롭게 읽었다. 다소 개인적인 내용이 많은 이 책의 1장에는 북측 학자들과의 학술교류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분단이라는 민족적 비극 앞에 남북이 함께 머리를 맞대지 못한 아쉬움이 짙게 느껴지는 챕터다.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남과 북이 한자리에 모여 같은 주제로 이야기 나눈다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게 되면 통일의 토대가 보다 단단해 질 것이다. 5장에서는 선친 박영석 선생의 연구 활동을 같은 연구자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있어 흥미롭다. 선친의 집안은 조부 박장현으로부터 4대째 역사학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선생은 부친의 뜻을 이어 독립운동사를 전공으로 삼고 있다. 이 역시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박환 선생은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30년 넘게 봉직했던 수원대학교를 정년퇴임하게 된다. 퇴임을 기념하며 오는 9월, 100권에 달하는 선생의 저작을 전시하는 ‘역사가의 길’을 노마만리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그의 정년퇴임 논총의 제목처럼 퇴임을 준비하는 시간이 연구자로서 반성의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출발이 궁금해지는 시간이다. 전시 ‘역사가의 길’은 그 시작을 알리는 행사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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