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고향서 미사일 도시로… 전쟁이 바꾼 도시의 운명

2023. 6. 3.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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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세계, 이곳] ⑧ 러시아 봇킨스크
우크라 아동병원 때렸던 미사일의 대표 생산지
전쟁 장기화에 공장 풀가동
살상 무기로 부흥한 예술의 마을
지난달 18일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키이우=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 중서부, 모스크바 동쪽 우랄산맥과 이어진 구릉지대에 우드무르트가 있다. '초원의 사람들'이라는 말에서 나온, 러시아 연방 안의 작은 공화국이다. 봇킨스크는 그 우드무르트 공화국에 있는 도시다. 인구가 10만 명도 채 안 되는 소도시지만, 차이콥스키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1840년 차이콥스키가 태어난 집은 세계적인 작곡가를 기리는 박물관이 됐다. 그러나 이제는 차이콥스키의 도시가 아닌 '미사일의 도시'로 더 유명하다.


푸틴의 각별한 관심… 다시 부흥한 '철의 도시'

봇킨스크의 역사는 쇠와 함께 시작됐다. 도시보다 제철소가 먼저 생긴 곳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 우랄산맥의 철광 부근 숲이 고갈되자, 제정 러시아는 제철 산업을 새로 키울 중심지로 봇킨스크를 낙점했다. 철광과 멀지 않고 아직 숲이 많이 남아 있는 데다, 근처에 카마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 시절부터 봇킨스크의 제철소들은 군함용 닻을 만들었고 한때 러시아 전체 선박용 닻의 60% 이상을 생산했다. 배도 만들고 기계도 만들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생긴 뒤로는 증기기관차도 만들었다. 차이콥스키의 아버지 일리야 페트로비치도 이곳 제철소의 엔지니어였다.

러시아 봇킨스크에 있는 차이콥스키 동상. 브리태니커 홈페이지 캡처

제국 말기에 내전이 벌어지면서 쇠락했던 공장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 무기 산업의 중심으로 거듭났다. 닻과 기차, 탱크를 거쳐 미사일의 도시가 된 것은 1957년부터다.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이 도시를 탄도미사일 생산기지로 선정한 것이다. 사거리 150㎞의 단거리 미사일 8A61을 시작으로 9M76 전술미사일, 소련의 첫 고체연료 미사일인 TR-1 템프, SS-16 시너 대륙간탄도미사일 등이 줄줄이 생산 라인에서 흘러나왔다. 냉전이 끝나고 한물가는 듯했던 봇킨스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집권 뒤로 제2의 부흥기를 맞았다. 2006년부터는 9K720 이스칸데르 미사일 대량생산이 시작됐다.

냉전, 군비 경쟁,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그 뒤에는 언제나 봇킨스크의 미사일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RT-2PM 토폴은 옛 소련 시절 개발해 러시아 전략미사일 부대에서 운용 중인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2014년 3월 크림반도를 멋대로 병합한 러시아가 카스피해 부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이 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크림 위기와 맞물려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봇킨스크가 푸틴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을 받은 것도 놀랍지는 않다.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시민혁명이 2011년 3월 이웃한 리비아로 번졌다. 미국과 프랑스 등 서방이 개입해 반정부 진영을 지원했다. 푸틴 대통령이 헌법의 대통령 3연임 금지 규정 때문에 잠시 크렘린궁을 나와 총리를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리비아 독재정권의 손발을 자르는 국제사회의 군사개입에 이례적으로 찬성했다. 이를 들은 푸틴 대통령은 메드베데프에게 몹시 화를 냈고, 시위하듯 봇킨스크의 미사일 공장을 찾아가 연설하면서 서방의 '십자군 전쟁'이라며 맹비난했다. 리비아 정권은 봇킨스크에서 생산된 R-17 미사일로 자국민과 맞섰지만 끝내 패했고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사막에 묻혔다.

러시아 우드무르트 공화국 봇킨스크 위치. 그래픽=김문중 기자

우크라와 소모전서 '무기 부족' 시달리는 러

다시 이 도시에 관심이 쏠린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이다. 러시아는 무력으로 탈취한 우크라이나 동부를 자기네 것으로 굳히기 위해 공세를 펼치고 있다. 지난달 초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무기 공급이 '특별 군사작전'(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렇게 부른다)에 결정적이라면서 미사일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릴 것을 방위기업들에 지시했다. 전쟁의 향방은 러시아의 무기고가 언제 비느냐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이미 작년 하반기부터 서방은 러시아의 무기 부족을 얘기했다. 영국 국방부는 지난해 7월 러시아의 최신 무기 비축량이 줄어 구형 무기에 의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 국방부 장관은 트위터에 도표까지 올리면서 러시아의 이스칸데르와 Kh-101, Kh-555 미사일이 떨어져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올해 초 우크라이나 국방부 정보국은 "러시아에는 대규모 공격을 세 번 감행할 정도의 미사일만 남아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전면전이 시작된 지 15개월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는 계속 미사일을 퍼붓고 있다. 키이우인디펜던트는 "러시아의 미사일 비축량을 아는 것은 러시아뿐"이라며 "우크라이나 정부의 추정치는 검증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이바노보의 세베르니 공군비행장에서 열린 '2019 러시아 전군 오픈 스카이 애국 축제'에 이스칸데르 미사일이 전시돼 있다. 이바노보=타스 연합뉴스

무기가 모자라는 징후가 없지는 않다. 이미 작년부터 대함 미사일 Kh-22나 S-300 같은 대공 미사일을 용도변경해 육상 공격에 쓰고 있는 것, 지난해 말 공습에서 탑재체가 없는 구형 Kh-55 순항 미사일을 발사한 것, 지난해 3월과 5월에 극초음속 탄도미사일 '킨잘'을 동원한 것 등등이 그런 예다. 킨잘은 이스칸데르를 공중발사용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다. 대기권 상공에서 시속 약 6,200㎞로 움직이며 레이더 시스템을 피해 간다. 푸틴 대통령은 "음속의 10배까지 낼 수 있는 이상적 미사일"이라며 러시아 무기 현대화의 상징으로 자랑한 바 있다. '단검'이라는 이름처럼, 킨잘은 유럽을 위협하는 러시아의 단검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공격에 쓰기에는 스펙이 과하다. 재래식 미사일이 모자라 킨잘까지 꺼내 들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영국 분쟁군비연구소가 지난해 11월 러시아 미사일을 수거해서 분석해 보니, 생산한 지 불과 몇 달밖에 안 된 Kh-101이 확인됐다. 비축고가 줄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로 군사전문가들은 해석했다. 이란산 공격용 드론이 늘어난 것도, 러시아군이 순항 미사일 대용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군축 전문 싱크탱크 위스콘신프로젝트는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 러시아가 단기간에 승리를 거두기 위해 미사일에 의존했으나 전쟁이 소모전으로 바뀌면서 비축고가 줄었고, 정확도가 떨어지는 소비에트 시대의 무기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된 것으로 분석했다.

4월 18일 우크라이나 방공망에 의해 격추된 러시아 로켓 잔해가 불타고 있다. 키이우=AP 뉴시스

봇킨스크 미사일 공장, 전쟁 열쇠 쥘까

중요한 것은 생산능력이다. 미국 롱워저널은 Kh-101 미사일의 경우 러시아가 '나흘에 한 기씩'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제임스타운재단은 러시아가 오닉스, 칼리브, Kh-101, 9M729, Kh-59 순항 미사일과 이스칸데르-M 탄도미사일 등을 합쳐 연간 총 225기를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 중 상당수는 무기회사 MKB라두가와 국영 방산업체 전술미사일회사(KTRV)가 생산한다. 지난 2월에는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을 맡고 있는 메드베데프가, 3월에는 쇼이구 국방장관이 미사일 공장들을 각각 찾아가 생산을 독려했다. 쇼이구는 이스칸데르와 부크, 칼리브 등등을 생산하는 러시아 최대 미사일공장 노바토르 플랜트를 찾아가 고정밀 무기 생산을 두 배로 늘리라고 지시하면서 "어려울 수 있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공장은 최근 3교대로 24시간 인력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엔지니어가 모자라 생산량을 급격히 늘리기는 힘들 것으로 서방은 보고 있다.

그다음 가는 시설이 봇킨스크의 미사일 공장이다. 이스칸데르, 야르스 탄도미사일과 핵잠수함용 불라바 탄도미사일을 생산하는 JSC봇킨스크는 원래 국영기업이었지만 2010년 푸틴 대통령의 국방개혁 때 민간기업이 됐다. 2020년만 해도 재정이 모자라 주4일 근무제를 도입하고 직원들을 정리해고했는데 전쟁을 일으킨 뒤 작년 3월 500여 명을 재고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9일 전인 지난해 2월 15일 벨라루스 고멜 훈련장에서 러시아군과 벨라루스군이 연합훈련을 하던 중 초정밀 타격 미사일인 토치카-U를 발사하고 있다. 고멜=EPA 연합뉴스

봇킨스크의 대표 미사일은 '토치카'로 흔히 불리는 OTR-21이다. 1975년부터 배치된 탄도미사일로, 한때는 동독에도 공급됐다. 1990년대 러시아는 체첸 자치공화국 분리주의자들을 상대로 이 미사일을 퍼부었다. 2008년 남오세티야에서도 러시아군은 분리주의 진영을 토치카로 폭격했다. 2015년에는 시리아 정부군의 무기로 등장했다. 2020년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가 이 미사일을 영토분쟁에 동원했다고 비난했다.

토치카는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 우크라이나 양쪽 모두의 무기로 쓰이고 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공격이 시작되자 곧바로 반격에 나선 우크라이나는 토치카-U 미사일을 발사해 러시아군 수호이 전투기를 떨어뜨렸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에서는 러시아군의 토치카 미사일이 아동병원을 타격해, 전쟁범죄라는 비난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항구도시 베르댠스크에서 러시아 군함 사라토프를 침몰시킨 것, 돈바스의 크라마토르스크 철도역에 떨어져 민간인 52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 모두 토치카 미사일이었다.

봇킨스크에서 태어난 미사일 중에 역사의 유물이 된 것도 있다. 한때는 핵미사일의 대명사였던 RSD-10 파이오니어다. 옛 소련 시절 총 654기가 만들어졌으며 냉전 말기 미-소 간 중거리핵전력조약에 따라 1991년 폐기됐다. 군축을 기념하기 위해 15기는 남겨 뒀는데 그중 하나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냉전의 흔적은 그렇게 기념관으로 갔지만 시대가 돌고 돌아 세계는 신냉전에 휘말리고 우크라이나는 전쟁터가 됐다. 이번 전쟁의 흔적들은 언제쯤 역사 속으로 사라질까.

구정은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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