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폭과 전쟁 100일...30년 악습 월례비·무법시위 사라졌다

정순우 기자 2023. 6. 3.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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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세우니 건설현장에 평화가 왔다
건설현장의 불법에 대한 정부의 엄정대응이 건설현장을 바꾸었다. 위 사진은 2023년 1월 서울 은평구의 한 공사현장 앞에서 건설노조가 채용을 강요하며 아침시위를 벌이는 모습. 아래사진은 2023년 6월 정부의 강력한 단속이후 불법행위가 사라지고 평온을 되찾은 모습./양승수·이기우 기자

민노총은 불법 시위에 대한 최근 경찰의 엄정한 대응을 “노동 탄압”으로 몰고 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도 2일 “노조 탄압이자, 노조 악마화”라며 노조 탄압을 규탄하는 장외 투쟁에 나서자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건설현장에서 건설노조의 불법행위를 바로잡기 위한 정부의 원칙적 대응이 출발점이다. 건설 노조의 채용 강요와 월례비 명목의 불법 자금 요구 등 불법행위를 뿌리 뽑기 위해 정부는 작년 말부터 전국 건설 현장에서 대대적인 실태 점검에 나섰고, 위법 행위를 적발했다. 경찰이 지난해 말부터 석 달 동안 전국 공사 현장을 대상으로 특별 단속을 벌여 적발한 불법행위 가담 노조원만 2863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29명은 구속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건설노조의 불법행위를 ‘건폭(建暴)’이라고 규정하며 “건설 현장 갈취·폭력 등 조직적 불법 행위에 강력히 대응하라”고 지시한 게 2월 21일이었다. 정부가 ‘건폭과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벌인 100일여 동안 건설 현장에선 거대한 변화가 생겼다. 월례비가 사라졌다. 월례비는 작업 속도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건설사들이 노조원에게 주던 ‘뒷돈’으로 건설 현장에 30년 넘게 뿌리 내린 관행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지난 3월 월례비를 받는 타워크레인 기사의 면허를 최장 1년간 정지하고, 월례비를 지급한 건설사도 처벌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현장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 또 머리띠를 두르고 와서 ‘노조원을 고용하라’던 무법 시위도 사라졌다.

이런 변화는 정부의 단호한 단속, 그리고 건설사들의 원칙적 대응이 맞물린 결과다. 정부는 작년 12월부터 건설협회 등을 통해 노조 불법 행위에 대한 신고를 접수하고, 경찰을 투입해 불법 행위자를 적발했다. 초기에 노조원들은 “공사가 늦어지면 건설사들이 곧 두 손을 들 것”이라며 조직적으로 야간 작업을 거부했다. 하지만 정부와 건설사의 태도에 변화가 없자, 노조원 스스로 야간 작업에 복귀하며 공사 현장은 정상화되고 있다. 최준선 성균관대 교수는 “떼쓰며 무법 시위를 벌이는 세력이 아무리 막강해 보여도 법과 원칙을 이길 수는 없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라고 말했다.

2일 오후 서울 은평구의 한 주상복합 공사 현장. 우뚝 솟은 타워크레인이 철근 더미를 쉴 새 없이 끌어올리며 작업 중이었다. 먼지 방지용 가림막이 처진 입구로 인부들이 들락거리며 철근 결박 작업을 교대로 하고 있었다. 내년 5월 완공을 목표로 콘크리트 타설 등 골조 공정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 공사 현장은 올 초만 해도 공기(工期)를 맞출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매일 아침마다 민노총 소속 노조원 10여명이 ‘단결 투쟁’이라고 적힌 붉은 머리띠를 두른 채 주변 아파트 주민들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크게 노래를 틀며 확성기 시위를 했다. 공사 현장에 “민노총 소속 노조원을 채용하라”며 공사를 방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올 2월 정부가 건설노조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면서, 노조의 공사 방해가 사라졌다. 현장 근로자 남모(68)씨는 “이제 걔네(노조)는 힘이 없다”며 “수년간 건설노조의 방해가 말도 못할 정도였는데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고 말했다.

◇ “건폭과 타협 없다” 원칙 세운 정부. 30년 관행 월례비도 100일 만에 사라져

건설 현장의 변화는 정부가 “건폭과 타협 없다”며 명확한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도 지난달까지 5개 지방국토관리청을 통해 전국 542개 건설 현장을 직접 점검해 42건의 불법행위를 찾아내 수사 의뢰했다. 정부는 경찰 인력만으로 수사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지난달 국토부 4~9급 공무원에게 특별사법경찰(특사경) 권한을 부여하기로 했다.

건설현장의 오래된 불법을 뿌리뽑는 일은 초반엔 쉽지 않았다. 월례비를 못 받게 된 노조 소속 기사들이 태업과 야간 잔업 거부 등으로 건설사를 압박했다. 안전을 이유로 평상시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속도로 조업을 하거나, 휴식시간에 안전모를 벗고 있는 직원의 사진을 찍어서 구청에 신고를 하는 방식으로 영업을 방해했다. 그러자 국토부는 3월 15일부터 4월 14일까지 전국 672개 현장을 점검해 태업을 한 작업자 54명을 적발해 고발했다.

그러자 건설노조의 힘은 빠지고 이른바 ‘노조 방해 현장’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국토부가 지난 3월부터 주간 단위로 전국 340여 현장을 대상으로 타워크레인 때문에 조업에 차질을 빚는 현장을 집계하고 있는데, 3월 셋째 주 195곳에 달했다가 4월 마지막 주 21곳으로 줄었고, 5월부턴 한 곳도 없다.

◇월례비 없으면 초과 근무 못 한다던 노조원도 수입 줄자 슬그머니 참여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조 불법행위에 대한 강경 대응에 나섰을 때, 노조만큼 결과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곳이 건설사들이었다. 이전 정부에서도 건설노조에 대한 대책을 발표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대부분 용두사미로 끝났다. 건설사들도 노조의 보복을 두려워 했다. 건설사 고위 관계자는 “예전에 노조의 불법행위를 신고했다가, 오히려 보복 집회에 시달린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가 일관된 대응에 나서면서 분위기도 변했다. 국토교통부는 현장 관계자가 노조를 만나게 되면, 내용을 반드시 보고하도록 했다. 월례비나 채용 문제로 노조에서 면담 요청이 오면, 현장 소장들은 “국토부에 보고해야 한다”는 핑계로 이를 피할 수 있었다. 또 개별 건설사 대신 관련 단체가 나서 불법행위를 신고했다. 한국타워크레인협동조합은 부산·울산·경남 지역에서 월례비를 7000만원 넘게 받은 기사 60여명의 명단을 작성해 수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건설사들이 ‘월례비 지급 거부’라는 원칙을 지키자, 수입이 줄어든 노조원들이 스스로 현장으로 돌아왔다.

다만 수도권 공사현장에 비해 지방에선 일부 건설노조가 여전히 채용 강요 등을 요구하는 사례가 있다. 월례비 대신 회식비로 노조에 뒷돈을 주는 곳도 일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건설업계에선 “건설현장이 과거도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선, 이번에 확실히 불법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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