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욘드 스테이지] 팬텀싱어 된‘국악신동’ 김수인 요즘 창극 공연장 풍경이 확 달라졌다. 판소리 귀명창 어르신들이나 공연 관계자, 전공자들로 채워지던 객석이 ‘뮤지컬 덕후’ 급 마니아들로 물갈이됐다. 이들은 제법 그럴싸하게 추임새까지 넣으며 공연에 동참하고, 커튼콜엔 기립박수로 환호한다. 국립창극단의 공연들은 매진이 예사다. 그간 다양한 실험으로 창극의 현대화·대중화를 모색한 결과, 지금 전성기를 맞았다는 게 중론이다.
무용까지 전공한 만능 국악인
신작 ‘베니스의 상인들’(8~11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도 평단과 관객의 관심이 집중됐다. 연출 이성열·극본 김은성·작곡 원일·작창 한승석·의상 차이킴 등 드림팀 창작진이 셰익스피어 희극을 딱 요즘 감각의 배꼽 잡는 코미디로 재창작했다. 배우진도 화려하다. 김준수·유태평양 등 팬덤이 탄탄한 젊은 두 주역이 맹활약하고, 러브라인 담당 바사니오 역을 맡은 창극단의 막내 김수인의 활약도 관전 포인트다. JTBC 팬텀싱어 시즌4 결승팀 ‘크레즐’ 멤버로 팬덤을 넓힌 후 처음 선보이는 본격 창극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국립창극단 연습실에서 만난 김수인은 ‘베니스의 상인들’과 팬텀싱어 결승 2차전을 함께 준비하느라 부쩍 수척해 보였다. 그는 “일주일에 링거를 두 번 맞을 만큼 힘들었다”면서도 패기 가득 눈빛을 빛내며 “결승곡이 블랙핑크 ‘킬 디스 러브’다. 마지막인 만큼 다 두드려 패는 곡을 택했다”고 했다. 두 마리 토끼를 온 힘을 다해 좇고 있는 그에 대해 이성열 연출도 “가장 열심히 연습하고 있으니 완벽한 바사니오를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이 원작이니 그가 주인공은 아니지만, 솔로곡만 6곡일 정도로 비중이 큰 ‘주연급 조연’이다. “분량이 정말 많지만, 신나게 하고 있어요. 철부지스럽고 우당탕탕 하는 게 딱 제 평소 모습이거든요. 주변에서 찰떡 캐릭터라고 하는데, ‘팬텀싱어’만 보고 오시는 관객분들께도 창극 배우로서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베니스의 상인들’은 음악적으로도 기대를 모은다. 1990년대 국악 대중화의 첨병이었던 퓨전 그룹 ‘푸리’를 함께한 작곡가 원일과 작창가 한승석이 오랜만에 뭉쳤기 때문이다. 한승석이 정통에 가깝게 창작한 소리 사이사이에 원일의 파격적인 전자음악 사운드가 어우러진다. “신나는 넘버가 많고 전체적으로 활기차서, 보는 내내 즐거우실 거예요. 외국 이야기에 걸맞게 서양 사운드가 굉장히 강렬하게 들어오지만, 작창과 소리의 기본 틀은 완전한 전통이라서 귀명창들도 좋아하실 것 같고요.”
‘팬텀싱어’ 탓에 연습에 지장을 받지는 않았단다. 뮤지컬 ‘영웅’ 출연을 겸했던 임규형을 비롯해 아이돌 조진호, 바리톤 이승민 등 팀원 모두가 ‘투잡’인 바람에 어차피 밤을 새워 연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방송사가 창극단 연습에 지장을 줄 만큼 들들 볶진 않더라고요.(웃음) 근데 저희 팀이 제일 바빠서 담당 작가님이 엄청 힘드셨어요. 제 경우 아침에는 창극단에 출근하고 ‘영웅’이 끝나는 12시쯤 모여서 서너시간 연습 후 2시간 자고 다시 출근해야 하죠. 이런 패턴이 반복되니 살이 점점 빠지네요. 공연 끝나면 제주도 여행 갈 생각으로 버티고 있어요.”
훤칠한 외모에 소리 뿐 아니라 무용까지 전공한 그는 스타성과 끼가 넘치는 만큼 서바이벌 방송에 최적화된 인재다. 그런데 왜 ‘팬텀싱어’였을까. “트로트 오디션들도 다 섭외가 왔지만 생각 없었어요. 팬텀싱어도 두 번 거절했는데, 세 번 만에 넘어갔네요. 걱정도 됐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나 싶어서 사고를 친 거죠. 새로운 도전에 대한 갈망도 있었고요. 기왕 나간다면 내가 즐겨 듣지만 무대서 해 보지 않은 음악을 풀어낼 수 있는 곳에 나가는 게 맞겠다 싶었어요. 팀을 결성한다는 것도 매력적이었고요. 포레스텔라의 음악을 워낙 좋아하거든요. 모든 장르의 음악을 그들만의 색깔로 해석하는 게 멋지잖아요. 저도 저만의 장르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거든요. ‘팬텀싱어’에서 블렌딩이 잘 되는 국악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잘 나왔다 싶었습니다.”
명창 어머니 뱃속에서 소리 익혀
유일한 국악인이라서일까. 그의 무대는 늘 주목 받았고, 심사위원들의 평가도 호평 일색이었다. 그는 “국악인이라서가 아니라 잘 해서 그런 것”이라고 당차게 말했다. “3라운드 때 윤종신 심사위원이 제가 있는 팀은 제 색깔로 이끌려가게 되니 제가 다른 장르에 도전해보는 게 어떠냐는 조언을 해 주셨거든요. 그래서 ‘나 하나 꽃피어’를 불렀고,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죠. 나름 어려운 도전들을 잘 해결했다 생각해요.”
윤학준의 가곡 ‘나 하나 꽃피어’는 쉬운 멜로디와 조동화의 아름다운 시어가 가슴을 울리며 이번 시즌 대표곡으로 떴지만, 그에겐 가장 어려운 도전이었다. “살면서 불러본 노래 중에 가장 어려웠어요. 가곡은 아예 안 불러봤는데 국악과 호흡법이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조용필 선생님의 ‘황진이’처럼 마이너 스케일의 가요나 팝은 국악인이 잘 표현할 수 있지만, 메이저는 국악에서 안 쓰는 음계니까요. 우린 막 때려 부수는 센 노래에 강하거든요.(웃음)”
어머니가 전주에서 활동하는 김선이 명창이라 뱃속에서부터 소리를 익힌 ‘국악신동’ 김수인에겐 그 어떤 음악보다 판소리가 익숙하다. 유튜브 촬영을 위해 초고난도로 꼽히는 적벽가의 ‘조자룡 활쏘는 대목’을 요청해도 곧바로 튀어나올 정도다. “IMF 때 집안이 어려워져서 세 살 때부터 어머니 학원에서 살았거든요. 하루종일 판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으니 무의식 속에 입력이 됐나봐요. 다른 음악도 좋지만 소리가 가장 재미있어요.”
크로스오버 가수 겸업을 하게 됐지만, 소리와 창극에 대한 초심은 흔들림이 없다. “다른 음악에도 발을 들였으니, 내 것을 더 열심히 해야죠. 그래야 내 색깔을 주장할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소리에 대한 갈망이 더 강해졌고, 두 마리 토끼를 잘 잡자는 생각입니다. 창극은 정말 매력적인 장르거든요. 국립창극단이 아니었다면 제가 이렇게 대단한 예술가들과 작품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힙스터같은 MZ 소리꾼이 완창이나 득음에 뜻을 품지는 않았을 터. 여러 장르를 다 아우르는 ‘예인’이 꿈이란다. “하나에 갇히고 싶지는 않아요. 찰리 푸스나 레이디 가가처럼 뭘 해도 다 예술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가왕’ 조용필 선생님도 존경하는데, 제2의 가왕은 제가 되고 싶습니다.” MZ 소리꾼은 거침없는 솔직함이 매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