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합적 구조 한옥, 비움·채움 통해 정신을 풍요롭게 하죠

서정민 2023. 6. 3.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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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렬 온지음 집공방장
김봉렬 온지음 집공방장. 김상선 기자
“한옥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 한옥이라 할까?” 온지음 집공방의 수장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인 김봉렬 공방장이 평생을 연구해 온 질문이다.

지난달 온지음은 『오늘이 깃든 한옥』(중앙북스)이라는 책을 펴냈다. 온지음은 우리 전통 문화의 가치와 정신을 창의적으로 계승해 올바르게 내일을 잇는 방법을 연구하는 전통문화연구소다. 한복을 짓는 옷공방, 한식을 짓는 맛공방, 한옥을 짓는 집공방이 있다.

건물 연결된 한옥, 생명체와 같아

대청마루 널 구조로 석재를 짜맞춰 신발을 벗는 불편함을 없앤 아름지기 사옥 내 한옥. [사진 온지음]
『오늘이 깃든 한옥』은 김 공방장과 함께 집공방이 10여 년간 작업해온 결과물 가운데 경주 배동 한옥, 동락당, 현대중공업 영빈관, 장원재사, 피츠버그대학 배움의 전당 내 한국관 등 13개 프로젝트를 선별해 소개한 책이다. 이중에는 전통적인 구조와 공법을 살려 옛날 그대로 지은 한옥도 있고, 현대적인 기술과 시스템을 이용해 지은 현대 한옥도 있다. 목적은 하나. 단순히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이나 한 번쯤 체험해보는 것으로 족한 옛집에 그치지 않고, 동시대 건축 형식의 하나로서 ‘품격 있는 주거문화’를 소개한다는 것이다. 온지음 신연균 운영위원장은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며 “집공방이 만드는 오늘의 한옥은 옛집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오늘의 삶을 담는 데 주저함이 없다”고 말했다.

책에는 계절의 흐름이 담긴 정갈한 한옥 사진들 사이마다 ‘글로 짓는 집’ 코너가 수록돼 있다. 김 공방장과 책 에디터가 땅 고르기부터 기와 올리기까지, 한옥 짓기 전 과정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담았다. 한옥에 깃든 미감과 가치는 물론 한옥에 대한 편견도 잠식시킬 수 있는 내용들이라 읽을수록 눈이 밝아진다.

김 공방장은 대학원 시절, 경주 ‘관가정’을 만나면서 한옥과 연을 맺었다. 450년이 넘은 작은 집이었지만 비움과 채움, 단순한 전체와 복합적인 부분의 통합, 구조와 공간의 상관성 등 건축적 본질을 발견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건축이 가능할까. 1년간 전국을 돌며 한옥을 답사했고 이후 세상이 놀랄 만한 최고의 건축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한국 건축사를 공부하기로 결심했죠. 제가 그래도 꽤 우수한 학생이어서(웃음) 담당 교수님은 엄청 말리셨지만 한옥에서 무한한 가능성과 깊이를 느꼈기에 주저 없이 빠져들었죠.” 다음은 지난달 말 북 토크에서 만난 김 공방장과의 일문일답.

전통 한옥 구법으로 지은 ‘화동재’. [사진 온지음]

Q : 20년 동안 한국 건축사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하다 뒤늦게 한옥을 직접 지었네요.
A : “한국 건축 전문가로 알려지면서 우연히 한옥 설계를 의뢰받았어요. ‘조선시대 건축가로 돌아가 창의적인 집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이었죠. ‘화동재’는 전통 한옥 구법 그대로 고재(古材)를 이용해 한옥의 미감은 살리고, 현대 생활에 맞는 구성과 배치로 오늘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해 지은 집이에요. 온지음 집공방의 초석이 되기도 한 프로젝트였죠.”

Q : 한옥의 가치를 정의한다면.
A : “비움과 채움을 통해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집이죠. 한국 전통 건축은 쓰임에 따라 지은 독립적인 채들이 모여 한 집을 이룹니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돼 있고, 각각의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이 배치되죠. 한옥의 방이 작아도 비좁은 느낌이나 불편함이 없는 것은 방과 대청마루, 마당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며 안팎의 공간을 유연하게 활용하기 때문이죠. 한옥은 생명체와 같아요. 숲을 예로 들면 나무 한 그루도 숲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고, 숲이 모여 산이 되면서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죠.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다시 부분으로 바뀌고, 다시 큰 전체가 되는 게 집합적 구조죠. 마당이 자연을 감싸 안는 레이어가 계속 중첩되는 구조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습니다. 현대 철학가들은 이런 건축을 좋은 건축이라고 하죠. 무수히 많은 겹이 나를 둘러싸고 있을 때 나는 보호를 받고 외부와의 관계도 원활해지니까요.”

Q : 한옥의 매력으로 ‘차경(借景)’, 집의 창과 문을 액자처럼 활용해 밖의 경치를 잠시 빌려 감상하며 즐긴다는 개념을 꼽는데요.
A : “집은 누구를 위한 공간일까요? 밖에 있는 사람들보다 집 주인들이 안에서 보는 게 중요하죠. 그래서 한옥은 집 위치를 정할 때도 산을 쳐다보도록 했죠.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대표작인 ‘폴링워터(Fallingwater·낙수장)’는 폭포 위에 지은 집인데, 한옥이라면 절대 이렇게 짓지 않아요. 폭포가 바라보이는 데 집을 짓지, 폭포를 깔고 앉아서 집에선 폭포가 전혀 안 보이도록 짓진 않죠.”
세계 건축 한 형식으로 자리잡아야

차경이 아름다운 ‘경주 배동 한옥’. [사진 온지음]

Q : ‘콘크리트로 지어진, 나무 기둥이 없고 기와지붕이 없는 한옥’도 가능할까요.
A : “한옥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움집이 있는데, 이건 아주 원초적인 세계 공통의 집이죠. 조선시대 때는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됐지만, 고려 때까지는 가족이 사는 본채와 손님이 기거하는 바깥채로 나뉘었죠. 나무를 사용하고, 기와지붕이 있는 구조는 수단일 뿐. 결국 한옥의 진정한 가치는 집안에서 누리는 ‘인간적이고 품격 있는 삶’이에요.”

Q : 아름지기 사옥의 한옥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맥락인가요.
A : “공공건물이니까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도록 바닥을 화강석으로 했죠. 한옥이라고 꼭 신발을 벗어야 하는가는 세계화의 큰 걸림돌 중 하나에요. 유럽인들이나 우리 젊은 층도 신발 벗는 걸 싫어하니까. 사실 고려 때까지는 실내에서 다 신발을 신었어요. 문화는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어요.”

Q : 요즘 MZ세대서 한옥이 유행하는데요.
A : “지금 그들이 한식·한옥에 열광하는 것은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1980년대식 국수주의적 이념이 아니라 ‘좋은 것 중에 우리 것이 있네’라는 보편적 평가에 근거한 취향이라고 봐요. 그런데 한식을 좋아한다고 매일 한식만 먹겠어요? 한옥을 소유하는 것도 불가능하죠. 잠시 체험해본 것을 지속적 재향유로 끌고 갈 방법으로 공간 분할 소유를 추천합니다. 한옥을 가질 수 없다면 한옥의 한 부분, 즉 한옥 인테리어를 갖춘 방 하나를 갖는 거죠. 좀 더 소극적으로는 의자·책꽂이·조명기구 같은 소품을 한옥 가구로 소유하는 거죠. 한옥의 가치는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집’이니까요.”

Q : 온지음 집공방은 한옥을 위한 새로운 기술 개발에도 큰 역할을 했네요.
A :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것들을 ‘이건 아닌데, 바꿔볼까’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연구를 하는 게 집공방의 역할이죠. 울산의 현대중공업 VIP 고객들 위한 ‘영빈관’을 지을 때까지도 한옥 창호 시스템이 없어서 덴마크에서 목재 시스템 창호를 수입해서 썼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건창호와 함께 한옥 시스템 창호를 개발했어요. 사실 한옥은 공간이 작아서 서양 규격대로 산업화된 싱크대는 너무 커요. 한옥을 현대식으로 개조한 주방에 들어가면 답답한 이유죠. 한옥 가구 등 기업의 투자가 많아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Q : ‘한옥의 세계화’는 가능할까요.
A : “한옥의 세계화란 전 세계인이 한옥에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계의 많은 건축 형식 가운데 하나로 한옥이 자리 잡아야 한다는 걸 의미하죠. 료칸은 일본에서 발생했지만 고급 온천 숙박 형식의 하나가 되어 세계 곳곳에 보급되고 있죠. 한옥은 어떤 건축 형식으로 세계 건축계에 위치할까요? 지속가능한 생태적 위치, 중첩적인 건축집합적 가치, 내외부 공간이 소통하는 공간적 가치 등을 지닌 집. 이를 건축적 디자인으로 승화시키고, 자재 연구를 비롯해 조명·가구·안전설비까지 연구·개발해야겠죠. 온지음 한옥의 궁극적 목표도 같습니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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