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떠난 중공, 새 영웅 ‘원자탄의 아버지’ 찾기 논쟁

2023. 6. 3.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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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78〉
중·일전쟁(1937~1945) 시절 베이징(北京), 칭화(淸華), 난카이(南開) 3개 대학이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에 설립한 서남연합대학은 명 교수와 인재의 집결지였다. 평생 핵 연구와 인재 양성에 매진한 왕청수도 남편과 함께 교사 생활을 했다. [사진 김명호]
인간은 공과 허물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묘한 동물이다. 변덕도 특성이라면 특성이다. 1976년 중국에 줄초상이 났다. 1월에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세상을 떠났다. 온 중국이 훌쩍거렸다. 이름 앞에 ‘인민의 총리’가 붙기 시작했다. 콧방귀 뀌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빼어난 연기자였다. 인간미라곤 전혀 없었다. 그 인간이 잔재주 부리는 바람에 문혁이 오래가고 린뱌오(林彪·임표)도 억울하게 죽었다.” 7월에 ‘중국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주덕)가 눈을 감았다. 절차가 저우에 비해 요란하지 않았다. 내놓고 말은 못 해도 뒤에서 쑥덕거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홍군은 모두 위대했다. 아버지가 따로 없다.” 9월 9일 마오쩌둥이 인간세상을 뒤로했다. 세계가 들썩거렸다. 신(神)의 죽음도 인간의 변덕 앞엔 속수무책이었다. 격하운동이 벌어졌다.

원자·수소폭탄, 인공위성 ‘양탄일성’ 화제

말년의 왕청수. 1993년 봄 베이징. [사진 김명호]
결국은 그놈이 그놈인 줄 알면서도 영웅 없는 세상은 싱거웠다. 중공(중국공산당)은 의도적으로 새로운 영웅을 찾기 시작했다.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탄과 수소폭탄, 인공위성에 얽힌 얘기들이 주목을 끌었다. 핵물리학자 첸싼장(錢三强·전삼강)이 ‘중국원자탄의 아버지’라는 말이 입소문을 탔다. 고만고만한 언론매체들이 경쟁적으로 첸에 관한 기사와 방문기를 내보냈다. 관심을 끌자 권위 있는 관방매체가 뒤를 밀어줬다. ‘중공중앙선전부’의 인정을 받은 것과 매한가지였다. 1차 핵실험을 지휘한 장아이핑(張愛萍·장애평)도 생전에 양탄원훈(元勳) 소리 들었지만 금새 흐지부지됐다. 장은 과학자가 아니었다.

1987년 6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소문만 무성하던 1차 핵실험 주역 덩자센(鄧稼先·등가선)의 업적을 살펴봤다. 국방과학위원회 부주임 임명장에 직접 서명했다. 1개월 후 덩자센은 원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7년 후 인민일보가 재미(在美) 화교물리학자 양전닝(楊振寧·양진영)의 추모문을 실었다. “우리는 전쟁시절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을 함께 다녔다. 50년간 쌓은 우정으로 가깝기가 형제보다 더했다”며 덩자센을 ‘미국 원자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와 함께 거론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의 말이다 보니 폭발력이 있었다.

명문 옌칭(燕京)대학 재학시절의 왕청수. [사진 김명호]
한 영국 학자가 자신의 저서에서 중국원자탄의 진짜 아버지는 네룽전(聶榮臻·섭영진)이라는 주장을 폈다. “중국의 국방과학은 네룽전이 총괄했다. ‘중국원자탄의 아버지’로 손색없다.” 새로운 주장이었지만 파급은 크지 않았다. 네룽전은 신중국 개국원수였다. ‘원자탄의 아버지’와는 급이 달랐다.

2011년 시골학자의 평론 몇 줄이 논쟁에 쐐기를 박았다. “한동안 ‘원자탄의 아버지’ 찾느라 갑론을박으로 시간만 허비했다. 현재 과학은 에디슨이 살던 시대와는 다르다. 원자탄이나 수소폭탄은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1964년 10월 16일 1차 핵실험이 성공하기까지 5058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제 몫을 했다. 뒤에서 무슨 일 하는지 모르고 일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모두 무명의 영웅들이다.”

왕청수 “화장 말고 의학용으로 써라” 유언

정부가 인정한 ‘중국 원자탄의 아버지’ 첸싼장. [사진 김명호]
다시 세월이 흘렀다. 2018년 가을, 경공업 부부장을 역임한 85세의 여성물리학자가 24년 전 세상 떠난 왕청수(王承書·왕승서)를 소환했다. “타고난 복을 누릴 줄 몰랐고, 돈이 있어도 쓸 줄을 몰랐다. 국가가 안겨준 엄청난 권력도 관심이 없었다. 평생 핵 연구와 교육, 인재 양성에만 매진했다. 양전닝과 덩자센 등 세계적인 물리학자도 서남연합대학 시절 왕 선생의 제자였다. 왕 선생이 없었다면 중국의 원자탄은 몇 년 늦었을 가능성이 크다. 1956년 좋은 조건과 환경 뿌리치고 미국 떠날 때 유력한 노벨 물리학상 후보의 귀국을 아쉬워하는 과학자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귀국 후 비밀업무 수행하느라 종적을 감췄다. 30년간 남편도 만나지 못했다. 왕 선생 만나기 전 나는 눈뜬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원자탄은 파괴와 살상을 위한 무기가 아니다.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자위용’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유서도 직접 읽었다. “80 춘추를 헛되게 보냈다. 귀국한 지 36년이 흘렀다. 그간 일에 매달렸지만 객관적 원인이었다는 이유로 귀국 전 하고자 했던 일을 완전히 실현하지 못했다. 국가와 국민에게 미안할 뿐이다. 죽음은 객관적 규율이다. 새처럼 미지의 세계로 날아갈 날에 대비코자 몇 가지 희망을 남긴다. 어떤 형식의 장례도 바라지 않는다. 화장할 필요 없다. 의학용으로 충분히 사용해라. 개인 서적과 자료는 과학원으로 보내라. 매달 국가로부터 국권(國券)과 현금을 과하게 받았다. 현금 8000위안은 평생 미혼인 언니에게 주고 나머지는 국가에 반납해라. 가내에 있는 물건과 의류는 며느리가 처리해라.” 읽기를 마친 노 물리학자가 통곡했다. “평생을 검소하고 깔끔하게 살았다. 옷도 두 벌이 다였다. 항상 실험복 차림에 손님이 오면 입었다가 깔끔히 빨아서 보관했다.”

왕청수의 행적과 연구가 줄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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