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불행을 ‘대박 기회’ 삼는 그들

주정완 2023. 6. 3.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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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중개자들
얼굴 없는 중개자들
하비에르 블라스, 잭 파시 지음
김정혜 옮김
알키

18세기 영국의 사상가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국부론』에서 “우리가 저녁상을 차릴 수 있는 건 정육점 주인, 양조업자, 제빵업자의 자비심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수많은 개인의 자발적인 이익 추구가 결국 번영하는 사회를 만든다며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스미스의 사상적 후예들은 “기업의 존재 목적은 이윤 극대화”라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일부 기업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행태는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현대 경영학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이유다.

니켈의 주산지인 인도네시아의 제련소에서 용해 공정이 진행 중인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파이낸셜타임스와 블룸버그통신에서 원자재 관련 뉴스를 담당해온 저자들은 원자재 업계가 역사적으로 걸어온 길을 이기심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저자들이 생각하기에 원자재 중개업체의 이기심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동시에 존재한다. 자원의 효율적 배분은 좋은 점이다. 저자들은 “원자재 중개업체는 시장이 더욱 효율적으로 기능하도록 하고 가격 신호에 반응해 자원을 효용 가치가 가장 높은 곳으로 옮긴다”며 “그들은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의 ‘보이는 손’이자 산증인”이라고 말한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 원자재 중개업체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식량난이나 오일쇼크 같은 ‘남의 불행’은 이들에겐 오히려 ‘대박의 기회’다. 증시에 상장한 기업이 아니란 점은 가장 큰 방패막이다. 이들은 회사의 경영 내용을 일반 투자자에게 공개할 의무가 없다. 그러니 회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외부에선 알기 어렵다. 음지에 감춰져 있는 원자재 중개업체의 실상을 양지로 끌어내는 게 책을 쓴 목적이라고 저자들은 소개한다.

일반 투자자에게 기업을 공개한 거의 유일한 예외가 있긴 하다. 영국 런던 증시에 상장한 글렌코어라는 기업이다. 본사는 스위스 중북부 소도시 바르에 있고 한국에도 진출했다. 전기차 배터리에 들어가는 니켈·코발트 등 금속 소재와 석유·밀을 주로 거래한다. 이 책은 글렌코어 창업자인 마크 리치의 생전 활동과 회사의 영업 활동을 소개하는 데 비교적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1934년 벨기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리치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 팔레비 왕조 시절이 리치의 전성기였다. 그는 이란산 원유를 싼값에 대규모로 확보해 유럽에 공급하는 방식으로 떼돈을 벌었다. 저자들은 “(리치의 성공적 거래로) 석유 시장은 세븐시스터스(세계 7대 정유사)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됐고, 세븐시스터스의 자리는 리치 같은 트레이더(중개업자)가 차지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새로이 자리를 차지한 트레이더들은 지켜야 할 역사나 평판도 없었으니 도덕심까지 버릴 준비가 된 자들이었다”고 평가한다.

1980년대 리치는 미국 수사당국에 의해 사기와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 회사의 운명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21세기에 들어서자 글렌코어는 중국의 부상과 함께 원자재 거래에서 막대한 이윤을 남긴다. 남아공 출신의 이반 글라센버그가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던 시기다.

이 책의 주인공은 리치와 글라센버그만이 아니다. 1~8장에선 그동안 원자재 시장을 쥐락펴락했던 큰손들에 주목한다. 리치를 비롯한 14명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계 백인 남성들이다. 원자재 시장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렇게 등장인물이 많고 다양한 일화를 한꺼번에 소개하다 보니, 책의 내용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주정완 논설위원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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